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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살이/여전히 직장인 2023

[일상] 벌써 일 년, aka 마의구간을 통과하다

 

 

역마살이 낀걸까? 이유불문하고 1년을 채우기가 무섭게 이직을 하게된다. 대학 졸업 후 한국 영국 통틀어 가장 길게 다닌 회사에서의 근무기간이 2년을 못넘긴다. 내 의지로 퇴사한 회사들에서의 생활을 회상해보면, 입사초기에 어리버리 하던게 6개월이 지나면서 업무파악이 어느정도 되어 삶이 편안해지고 그 이후부터 급 지루해져 떠날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내 머리가 뛰어나게 좋아서 단기간에 업무를 마스터 한게 아니라 그만큼 들어가기도 나오기도 쉬운 포지션들이었다. 역마살에 몸을맡겨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회사원이 내 운명인걸까 하는 의심을 마음 한켠에 품고 살아왔으나 현 회사에서는 왠걸 6개월이 지나고 8개월차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시점까지도 마의구간이 오지 않았다. 반년 넘게 새로운 것들을 머리에 우겨넣고 있다보니 지루함은 커녕 모른다는 것에 대한 고통 + 자괴감 그리고 배웠을 떄의 희열의 연속으로 근무기간을 세고있을 여유같은 건 없었다. 10개월 차에 접어들자 어느정도 업무에 적응이 됐고 그래서인지 해야할 일이 더 눈에 띄어서 바빠졌다. 정신차리고 보니 입사일로부터 1년이 지났다. 저주에서 풀려난 동화속 주인공처럼 어? 퇴사하고싶은 맘이 들지 않네? 짤리지도 않았어! 라는 대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나니 지금까지 거쳐온 회사들과 현 회사를 비교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왜 이곳에선 마의구간의 법칙이 성립되지 않은걸까? 우선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업무폭이 꽤 넓어서 6개월 안에 일을 마스터 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무지한 나 자신과 마주해야하는 시간들이 많아 처음엔 괴로웠으나 난이도 높은 업무를 척척 해내면서도 자만하지 않고 한결같이 그리고 친절하게 도움의 손길을 건내는 동료들을 보고 과묵한 고수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멋짐에 치여 스스로 겸손해져야겠다고 다짐했던 것 같다. 여기에 재택업무가 한 몫 했다. 1년을 함께 일한 동료들인데도 얼굴본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라 아직도 서로 많이 낯설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친해지면 아군이 생겼다는 안도감에 회사일을 대하는 태도가 안일해지기 마련인데 현 회사에서는 상사를 뒷담화 할 절친같은건 없으므로 긴장감 아래 업무에 집중할 수 있다. 가끔 회사 이벤트에서 만나면 협업하는 타팀사람들을 오랜만에 만난 느낌이다. 얼마전에도 런던에 놀러간 김에 사무실에 네다섯 번 나갔는데 그 중 절반은 나 혼자 사무실을 썼다. 소셜라이징을 중요시 여기는 누군가에게는 우리회사가 마냥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나름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쓸데없는 이야기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일로만 깔끔하게 대화하기 때문에 회사생활에서의 잡음이 많이 덜어진다.

 

기술적으로도 아주 많이 배운 한 해였다. 내 코딩인생 중 가장 많이 배운 일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중 Redux와 Typescript를 터득하는데에 가장 긴 시간이 걸렸다. 아직도 데이터를 불러와서 payload로 저장하는데서 실수가 꽤 나온다. 업무에 익숙한 정도를 굳이 따져보자면 20:80으로 처음해보는 업무가 80% 정도 된다. 이 땐 불안+초조+집착으로 하루를 보내고 익숙한 20%의 업무가 주어질 때에는 조금 지루하지만 그냥저냥 일을 해나간다. 낯선 업무를 하는 날들은 스트레스를 받지만 하루를 알차게 살아냈다는 느낌이 들어 뿌듯하다. Pull request 에서 받는 comment 갯수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 전에 받았던 코멘트들은 지금 생각해보면 말같지도 않은 오타와 실수 투성이 코딩에 대한 지적이었다. 처음 코멘트를 받을 때에는 공개처형 당하는 느낌이어서 너무 부끄러웠지만 그 코멘트들이 쌓여 현재는 내 가 쓴 코드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고 상대적으로 적은 코멘트를 받는 깔끔한 PR을 만들 수 있게 되어서 만족한다. 스킬은 평생 이렇게 들쭉날쭉 하면서 배우면 느는게 눈에 보이는데 의외로 리더십이 필요한 업무들에서 막힌다. 예를들면 우리팀이 사용하는 코딩방법을 유지하기 위해 타 팀에서 넘어오는 데이터 구조 변경을 협의 해야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이 타팀에 있을거라 생각하지 못하고 내 코딩만 냅다 파곤 한다. 사수의 풍부한 경험으로 이 문제는 니가 머리싸맨다고 해결될 게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강경하고 예의바른 영어로 타팀을 설득한다. 나도 현지인의 우아한 영어를 업무에 써먹고싶지만 정작 당황하면 나오는 영어가 1차원적이라 다소 불친절하게 말해버리곤 한다. 오늘 아침에도 내가 월요일에 휴가를 가니 누군가 나를 대신해 앱을 배포해야할 것이라는 말을 한다는게 Someone need to do it 이라고 말하고 뒤늦게 아차 싶었다. 다행인건 다양한 국적이 모인 회사여서인지 누구도 내 영어로 트집을 잡지 않는다.  

 

마의 구간을 잘 넘기고 나니, 현 회사에서 내 커리어를 어떻게 발전시킬지에 대한 계획을 세워야 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CTO에게 근무 1주년 기념 미팅을 신청해 회사에서 지난 일년간 일하면서 느낀점을 피드백으로 건내주고 앞으로 나를 이렇게 저렇게 키워줬으면 좋겠다는 요청사항을 전달했다. 이제 지긋지긋한 Mid딱지 떼고 Senior로 올라갈 준비를 해야겠다. 스킬셋이 안맞아 당연히 떨어질 거라고 여기고 생각없이 지원한 회사에 입사해 꽤나 괜찮은 일년을 보냈다. 인생 참 의도치 않은 곳으로 잘도 흘러간다. 마의구간을 잘 지나친 나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며 다음 일년도 다이나믹하고 의미있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