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두 달 간 한국에 다녀오기 위해 런던집 계약을 끝냈다. 집을 비워두는 동안 렌트비를 내는게 무의미 했기 때문에 살림살이는 모두 파트너의 고향집에 옮겨두고 계약을 끝낸 뒤 한국에 다녀왔다. 한국에 다녀와서는 렌트에 얽매이지 않는 김에 올 한 해 동안 이곳 저곳 오가며 앞으로 어디에 정착할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믿기지 않으면서도 매달 내고있었던 어마어마한 금액의 렌트비가 나가지 않으니 갑자기 삶이 윤택해 졌다. 렌트비로 다달이 나가는 돈을 그대로 모았다면 집사는데 필요한 보증금을 거뜬히 냈을 것이다. 그정도로 런던의 렌트비는 괴팍하다. 요 몇 달 파트너의 부모님 댁에 살다 보니 렌트 이외에도 기본적으로 생활유지를 위해 내야하는 금액이 거의 나가지 않아 영국에 넘어와서 아니, 성인이 되고난 뒤 처음으로 돈에 연연하지 않으며 지내고 있다. 자취생의 최고 꿀팁은 부모님 집에서 나오지 않는것 이라고 어디서 읽었는데 그야말로 현답이다. 파트너의 고향동네는 런던에서 대중교통으로 두세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위치해 있는데 그렇다고 깡시골은 또 아닌, 있을 것은 다 있는 중소도시 느낌의 동네이다. 단지 무언가를 하고자 할 때 선택지의 폭이 좁아지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예를들면 클라이밍이 하고싶은데 딱 한곳만 있어서 다른곳과 비교해보고 가는 것이 불가능 하다. 클라이밍 센터가 존재하는것 자체에 감사하고 가야한다 ㅋㅋ 영국에 와서 줄곧 런던에서만 살아봐서 이 곳에 오기 전 까지는 런던의 삶과 비교할 다른 지역에서의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스스로가 런던에 큰 미련이 없다고 믿어왔고 언제든 런던을 떠날 준비가 되었다고 떵떵거리고 다녔다. 허나 이 조용하고 여유로운 동네에서 몇 달 지내다 잠깐 런던으로 주말여행을 다녀와보니, 런던에서의 삶이 주는 편리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크리스마스 파티 겸 오랫동안 못본 얼굴들을 만나기 위해 5일 정도 이스트런던에 머물렀다. 내가 보는 이스트런던은 어느 시간대에 지나치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른데 낮에보면 보면 초창기 홍대처럼 힙스러움과 개성이 넘치기도 하고 저녁에 보면 꽤나 러프한 동네이다. 그래서 브릭스턴에 살 때에는 딱히 약속이 있지 않고서야 일부러 찾아가는 동네는 아니었는데(그렇다고 브릭스턴이 안전한 건 아님) 이번 여행에서 이스트런던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영국살이 짬이 쌓여서인지 예전엔 무섭고 가기싫던 동네들이 이젠 꽤나 힙해보고 사람사는 곳이란 느낌이 든다 (물론 우범지역 근처엔 얼씬도 않는다). 오랜만에 사무실에 출근해서 크리스마스 파티도 하고 한동안 못 본 친구들을 만나느라 하루에 두탕의 약속을 뛰는 등 눈코뜰 새 없이 후루룩 5일을 보냈다. 이동하는 시간 중간중간 아 이게 런던이었지 하는 찰나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한국음식 냄새였다. 길을 걸을 때 코끝을 스치는 한국음식 냄새를 맡고 뇌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런던에 살 때엔 굳이 돈주고 사 먹기엔 실망스러운 맛이어서 외면하던 음식들이 마냥 향기로워서 애증의 와사비 에서 스윗칠리 치킨도 사 먹었다. 먹고 바로 후회했지만. 게다가 너무나 오랜만에 한식재료들을 마트에서 마주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한류의 영향인걸까 센터에는 한국슈퍼마켓이 더 생긴 것 같다. 가장 유명한 두개의 한국슈퍼가 해리포터 샵을 중간에 끼고 같은 거리에 위치해있다. 맞은편엔 줄 서서 먹는 핫도그 가게까지… 일단 여기서 런던에 대한 호감도가 살짝 올라갔다. 그리고 또 하나 잠자던 나의 런던감(?)을 깨운 것이 있는데, 거리를 걸을 때 마주치는 인종의 다양성이다. 런던에 오기 전 한국에서 혹은 미디어에서 주로 접한 외국인이 백인이라 머릿속 서양인은 백인이 디폴트 였다. 그래서 갓 영국에 넘어왔을 때에는 백인이 많은 동네에 있는게 그나마 마음이 편했는데 몇년 살아보니 이민자 마음은 이민자가 안다고 이제는 피부색이 다양하게 섞인 동네가 맘이 더 편하다. 여기선 나만 이방인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긴장을 낮춰준다.





길에선 항상 바쁘게 걷고 어딜가도 줄이 늘어선 런던에서의 며칠을 보내고 나니, 매일 뭐 먹을지 정하는게 하루의 가장 큰 고민거리 였던, 지방살이에 익숙해져있던 나의 뇌는 180도 바뀌어 점심시간임에도 배가 고픈지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실 배가 고파도 먹을(만한)곳이 널려서 메뉴에 대해 그리 고민할 필요가 없다. 맛없는 한식 이라도 근처에 있는게 훨씬 낫다. 그렇게 정신없는 며칠을 보내고 다시 고향집에 돌아와 문득 깨달았다. 나 런던 좋아하네? 그래서 파트너와 상의끝에 한 달에 한 번 씩 런던에 가서 며칠씩 있다 오기로 했다. 역시 떠나보니 알게된다. 렌트를 안내는 삶이 너무나 매력적이지만 아직은 런던에 몇 년 더 살아도 될 것 같다.
'런던살이 > 여전히 직장인 2023'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상] 상반기 디지털노마드의 삶 정산 (1) | 2023.07.22 |
---|---|
[일상] 코드리뷰에 진지하게 임하라 (feat. 매운맛 코드리뷰) (1) | 2023.05.03 |
[일상] 벌써 일 년, aka 마의구간을 통과하다 (1) | 2023.04.09 |
[Savage Sisters] 팟캐스트를 시작하다 (0) | 2023.03.10 |
[일상] 연봉인상 통보 (0) | 2023.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