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상반기엔 영국 안팎으로 정말 많이 돌아다녔다. 작년 말 한국에서 재택근무를 해보고 나니 못할 것도 없겠다 싶어 올 한 해는 지갑사정이 허락하는 한 할 수 있는 만큼 유동적으로 돌아다니며 일해보기로 했다. 영국집, 공유오피스, 회사, 호텔, 친구집, 한국집, 마드리드 그리고 기차 안 까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했던 것 같다. 시차를 거스른 업무가 처음에나 겁났지 막상 해보니 점점 간이 커져 정기검진 하러 간 병원에서도 해볼까 하는 과감한 생각을 했었다. 결국 실행에 옮기진 않았지만 (막상 병원에 가보니 1인실이 아니고서야 고통의 신음소리가 난무하는 병실은 일하기 쉽지않은 환경이었다). 스스로가 이렇게까지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는 성향은 아니라 여기고 살아왔는데 생각보다 잘 맞고 또 얻는 이득이 쏠쏠해서 재미삼아 상반기 디지털 노마드의 삶을 정산해 본다.
디지털 노마드라고 해서 사계절 따듯하고 물가가 착한 여행지에서 낮엔 일하고 저녁엔 감성에 젖는 식의 근사한 삶을 그릴 수도 있다. 그러나내가 겪은 노마드로서의 삶은 지극히 현실적으로, 휴가를 아끼고 또 시차가 다른 나라에서 일함으로 인해 회사에 찍히지 않기위한 몸부림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작년 말 두 달 간의 한국 방문으로 디지털 노마드 신고식을 치렀다. 처음엔 한국시간으로 오후에 시작해서 자정에 일을 끝내는 것에 대한 부담이 꽤나 컸었다. 그래서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노트북과 연결해서 쓸 수 있는 모니터와 모니터 받침대, 노트북 받침대, 키보드, 마우스를 줄줄이 사서 풀세팅을 해놓고 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업무에 그다지 적응한 상태가 아닌데다 환경이 바뀐것에서 오는 부담감에 초반 한 달 정도는 정말 집중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뭔가 진도가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려 졸린눈을 치켜뜨며 책상앞에 꾸역꾸역 앉아있었다. 두달차에 접어드니 어느정도 적응이 되어 하품을 쩍쩍 하면서도 어찌저찌 업무시간을 채웠다.
영국에 돌아온 뒤 시차적응을 핑계로 집에서 몇 주 정도 재택을 했는데 이 짓도 오래는 못하겠다 싶은게 사람이 점점 늘어지고 몸도 약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도 그럴것이 업무시작 5분전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잠옷차림으로 일하고 집밖에 한 번도 안나가다보니 루틴이 깨저버려 다시 판데믹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집근처 공유오피스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이 와중에 런던에 한 달에 며칠씩 왔다갔다 하다보니 자연스레 영국 안에서 돌아다니는 삶이 시작되었다. 런던에 가면 주로 사무실에 들러 동료들에게 얼굴도장을 찍기도 하고, 또 소셜라이징이 귀찮은 날엔 호텔에서 업무시간만 채우고 드러누워 쉬었다. 똑같이 밖에 안나가는 날이어도 집이 아니어서 그런지 집에서 하는 재택 특유의 권태감은 없었다. 얼마 안 가 지인이 집을 저렴한 금액으로 렌트하겠다는 제안을 해와서 또 그 동네에서 한 달 정도 머물렀다. 일하는 책상이 단기간에 몇 번 바뀌고 나니, 문득 왜 초반에 집중을 못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낯선 환경에 시선을 빼앗기는 순간 집중력이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시야가 자주 바뀌는 만큼 최대한 집중에 집중을 거듭하다보니 어느새 어디에서도 모니터만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겨버렸다. 결국 달리는 기차 안에서 일하는 경지까지 가게 되었다. 내가 꼽는 우리회사 최고 장점이 어느 시간대이건 하루 8시간만 채우면 된다는 건데 기차에서 일을 할 때에는 이 혜택을 제대로 뽕뽑을 수 있다. 기차여행을 하는 시간동안 일을 하면 업무시간이 깎일 뿐만 아니라 지루한 여행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가끔 역방향에 타면 멀미가 날 수도 있지만 그것도 집중하면 안느껴진다. 버스는 아무것도 안해도 멀미가 나는 체질이어서 도전을 못해봤고 비행기도 인터넷 상태만 괜찮다면 해보고싶다.
또 하나 터득한 것이 사이드모니터, 키보드, 마우스, HDMI 케이블 등등 굳이 이런 장비들이 없어도 노트북과 충전기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거다. 최근까지 모니터를 제외한 장비들을 바리바리 챙겨서 이동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얘네들 없이도 충분히 일할 수 있다는걸 몸소 체험하게 되어 이제부터는 딱 이 둘만 챙겨다닐 예정이다. 사이드 모니터가 없는 대신 코어운동을 열심히 하고 거북목에 대한 자각심을 키워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려 한다. 자세가 안좋아질 수 있는 점과 더불어 굳이굳이 단점을 꼽자면 동료들과 소셜라이징 할 기회가 적다는 것 정도가 있을텐데... 어차피 회사에 친구사귀러 가는건 아니므로 이부분은 그다지 큰 타격을 주진 않는다. 여기에 비해 휴가를 아낄 수 있고 하릴없이 흘려보내야만 하는 시간을 업무로 채워 자유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 직업만족도를 최상으로 올려준다. 영국도 점점 사무실 출근을 권장하는 회사들이 늘고있고, 현회사 덩치가 커지면 나 역시 언제 다시 사무실에 발이 묶일지 모르지만, 환경이 허락하는 한 열심히 돌아다녀보려 한다. 다시 한 번 재택근무 만세!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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