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런던살이/여전히 직장인 2023

[일상] 대환장 파티 영국기차

영국 기차는 다양한 이유로 꽤 자주 캔슬된다. 비, 바람, 눈 등 자연현상 혹은 파업에 의해 처음엔 연착으로 시동을 걸다 얼마안가 줄줄이 캔슬을 해버리곤 한다. 태풍이 와서 캔슬된다 하면 이해 하겠다만 잔잔하게 깔리는 비나 눈에도 큰 타격을 입으니 가끔 한국의 교통시스템이 그리워진다. 캔슬이 되면 다음에 취해야 할 액션은? 다음열차에 올라타면 된다는 것이 그들이 제시한 솔루션이다. 잠깐만요, 그럼 제가 예약한 자리는요? 내 알 바 아님. 비어있는 좌석에 앉으세요^^. 제가 예약한 기차는 직행이었는데 다음열차는 환승해야하는걸요? 웅 그건 니사정^^. 이런 말도안되는 일이 일상다반사인 영국이다. 꽤 자주 겪다보니 기차여행을 할 때에는 제비뽑기 하는 것 마냥 나름 설레기까지 한다.

 

그리고 얼마 전, 내 영국 이민사에 특히나 기억에 남을만한 일이 일어났다. 그날 역시 런던에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미리 예매해두었던 기차가 캔슬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다음 열차는 직행이 아니어서 그다음 열차를 예매했고 가장 저렴한 티켓이 캔슬된 티켓의 두 배 금액이었다. 일단 집에 가는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이 열차마저 캔슬되지 않길 바라며 예매를 했고 다행히 정시에 기차가 출발했다. 열심히 달리던 기차는 종착지를 한시간 정도 남기고 한 역에서 유독 오래 정차했다. 매니저가 말하길 이 역에서 기사를 교체해야 하는데 교체 할 기사가 타고있는 열차가 터널에 갇혔단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매니저의 애절한 호소가 몇번에 걸쳐 방송된 뒤 한시간 하고도 10분 정도가 지났을 때 다른 대체기사가 도착했다며 여행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한시간 10분을 정차해있는 동안 일부 사람들은 여정을 포기하고 택시를 불렀다. 조금만 참으면 되는걸 못참고 내린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이사람들이 혜안이 있었던게 아닐까 싶다. 기차가 다시 출발하고 부디 오늘안에 집에만 갈 수 있기를 바라며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대려는데 갑자기 매니저가 돌아다니며 종점까지 가는 사람들의 수를 세기 시작한다. 이 때 불길한 예감이 몰려왔고 아니나 다를까 매니저의 목소리가 다시 방송을 타고 흘러나왔다. 이 기차는 종점 직전 역 까지만 운행 할 예정이며 해당역에서 부터 종점역 까지 가는 버스가 대기하고있을 "수도" 있단다. 하... 보통 기차가 파업을 하면 기차역에 대체 수단으로 버스를 배치해두기는 한다. 근데 이렇게 실시간으로 사람들을 뱉어내고 나머지는 버스로 가라는 경우는 또 처음본다. 내리라는데 어쩌겠는가. 결국 기차에서 내려 역 스탭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스탭은 그런말 들은 적이 없고 종점으로 가는 열차는 한시간 뒤에 온다고 했다. 이 때가 이미 밤 열한시 반이었다. 여덟시 반에 출발해 열시 반에 도착해야하는 여정이 완전히 꼬여버리는 순간이었다. 나를 비롯한 20여명의 승객들이 그자리에서 벙쪄있자 곧이어 기차에 함께 타고있었던 매니저가 내려 우리와 대화했던 스탭에게 꽥 소리를 질렀다. 멀뚱멀뚱 보고있지 말고 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방법을 찾으라면서. 우리의 구세주 매니저가 어딘가에 전화를 걸더니 승객들에게 종점역까지 가는 택시를 제공할 것이니 스탭들을 따르라고 하면서 그녀는 홀연히 떠났다. 보셨잖아요... 저 스탭들 도움 안되는거...ㅜㅜ 가지마요... 라고 하고싶었으나 퇴근시간 칼같이 지키는 영국인을 어찌 막으랴. 승객 모두가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고싶은 맘을 담아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여기서 환장 2탄이 시작된다. 멍청스탭이 말하길 자기들이 부를 수 있는 택시가 여기서 한시간 떨어진 곳에서 온다고 한다. 로컬택시 불러서 가면 10분만에 갈 거리를 왜 부르지 않는거지? 답답해진 사람들이 결국 그룹을 지어 로컬택시를 잡아타고 종점역으로 향했다. 나와 파트너도 세 명의 승객과 택시비를 나눠 인당 5파운드 씩 냈다. 

 

내려보니 이미 종점역에 셔터는 내려가 있었다. 멍청스탭이 말한 한시간 뒤에 온다던 기차역시 종점역 전에 사람들을 뱉어냈을거다. 종점역에서 집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여서 그때 조금 안도감이 들었다. 이 긴 여정을 함께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 집에 가려는데 한 여자애가 자기동네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하냐고 물어봤다. 여기서 환장 v2.1.0 이 시작된다. 이친구가 가야할 곳은 종점역으로 부터 차로 한시간 거리였다. 영국에 온지 얼마 안돼 상황파악이 잘 안됐었나보다. 종점역이 그녀의 환승역이었기에 무조건 종점역만 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우리 택시에 따라탔던 것 같다. 그때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겼고 유일한 환승역은 셔터를 내렸고 버스도 가장빠른 시간이 이른새벽이었다. 우버나 택시를 부르길 추천해줬으나 택시를 부르는 방법도 알 길이 없는 얼굴이었다. 결국 내 파트너가 지역 콜택시를 불러 (먼 길 가야한다고 기름넣고 오느라 그마저도 20분 정도 기다림) 그녀를 태워보내고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집에 와서도 그날의 경험이 믿기지가 않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 얘기를 해주자 지방에 살아본 경험이 있는 친구는 이런일이 비일비재 하다고 했다. 대체 왜 5분만 더 가면 되는 한 정거장을 굳이 안가고 사람들을 길바닥에 뱉어버리는걸까.

 

다이나믹한 여행의 여운이 사라져갈 즈음 기차회사에서 캔슬된 건에 대한 클레임을 걸 수 있는 링크를 보내왔다. 애초에 캔슬된 기차만을 위한 링크였으나 내가 타고온 기차까지 두 개 다 클래임을 걸었다. 최대 20일의 심사기간이 걸릴거라는 답장을 받았으나 내가 타고온 기차에 대한 클레임이 거절되었다는 메일을 당일 받았다. 이미 탑승했기 때문에 환불해줄 수 없다는거다. 해당 열차의 험난했던 여정에 대한 정보가 그들에겐 공유되지 않은 것 같다. 어찌되었건 리젝션에 대한 클레임을 걸 수 있는 링크가 따로 있어서 거기에 상세한 설명을 적었고 다시 최대 20일이 걸린다는 답을 받았다. 영국 답답한거 하루이틀이 아니라 이런걸로는 타격도 없다. 탈 때 마다 금액대도 천차만별인데다 보장되지 않은 여행길에 오르게 만드는 영국 기차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여기저기서 들을 수 있지만 과연... 언제쯤 걱정없이 기차에 올라타 목적지에 도착하는 평범한 경험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