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회사에 꽤나 만족하며 다니고 있었는데 얼마 전 이직을 위한 문을 활짝 열게만든 일이 있었다. 우리회사에는 내가 입사하고 두 달 뒤 낙하산으로 입사한 나보다 족히 열살은 많은 주니어가 있다. (이하 낙씨라 칭하겠다) 낙씨는 회사의 모든 업무를 관장하는 사장급 개발자의 부인이다. 개발과는 거리가 먼 일을 꽤 오래 해서 어느정도 높은 직책에 있다가 돌연 부트캠프를 수료하고 개발자로 전향했다고 한다. 그녀의 입사소식을 접할 때 까지만 해도 그녀의 남편이 우리팀과 가깝게 일하지 않는 포지션이고 낙씨의 직책또한 주니어이기에 딱히 불편할 일은 없겠지 싶어 그러려니 했다. 두 달 밖에 안다닌, 아직 프로베이션 중인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반대를 하겠는가? 한국에서 가족회사에 몇 번 데인터라 찜찜함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었으나 나도 이 회사를 잘 모르는 상태여서 일단 두고보기로 했다.
그렇게 나와 낙씨의 1년이 지났갔다. 그 동안 낙씨는 주니어답게 많은 질문들을 던져댔고 또 열심히 흡수했다. 단지 그 과정에서 배우는 입장으로서의 태도가 장착되지 않아 도움주는 사람을 적잖이 불편하게 했다. 예를들어 내가 그녀와 페어링하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주면 다른 팀원이나 사수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들이 이 답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고 내앞에서 대놓고 말하거나 스스로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려 노력하는 시간이 다소 짧아 슬랙 메세지로 질문을 하는 빈도가 지나치게 잦았다. 실시간으로 던져대는 질문공격에 답을 들어도 오해를 하는 요상한 태도. 물론 주니어이니 뭘 모르는지 모르는 상태가 많이 답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 해결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고 설령 그 답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맘에드는 답을 주는 사람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처음 몇 번은 낙씨의 이런 태도에 내 스스로의 자질을 의심하기도 했다. 내가내린 결론은 낙씨와 나는 맞지 않는다는거다. 그래서 왠만하면 그녀와 엮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낙씨를 트레이닝 시키는건 내 일이 아니므로 가끔 오는 코드리뷰만 해주면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내 인내의 한계 스위치에 손을 뻗었다. 낙씨는 요즘부쩍 아침부터 하루에 몇 번 씩 실시간으로 코드리뷰 독촉을 하는데 그날은 유독 참기 힘들어 있는없는 내안의 젠틀함을 쥐어짜 한마디 했다. 코드리뷰를 기다리는 동안 다음 타스크로 넘어가서 작업한 뒤 리뷰가 끝나면 그 브란치에 리베이스 해서 마저 작업하라고. 그런데 낙씨가 리뷰된 코드에 수정이 많으면 리베이스 할 때 충돌이 생겨서 그렇게는 안하고싶덴다. (깊은한숨) 모두가 바쁘면 어쩔 수 없이 다음 타스크로 넘어가야 할 것이고 리베이스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마지막 한방울의 젠틀을 짜내어 답장을 보냈고 그녀는 답이 없었다. 그날 오후 사수에게서 코드리뷰에 대한 의견을 묻는 콜이 왔다. 왠만해서 먼저 연락하는 일이 없는 사수가 정황을 살피며 코드리뷰가 어떻게 되어가냐고 묻는걸 보니 낙씨가 그녀의 남편에게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 사수에게 이야기를 전달하지 않았을까 예상해본다. 내친김에 사수에게 낙씨의 코드리뷰 독촉에 대해 말했다. 사수는 내 의견에 동의했고 앞으로 같은문제가 반복되면 자기가 나서겠다고 했다. 낙씨의 태도가 상당히 불편했지만 이날의 대화로 어느정도 낙씨가말귀를 알아들었길 바랐다.
그 길로 해피엔딩이었음 내가 이 글을 남기지도 않았지. 정확히 일주일 뒤 아침 그녀가 다시 개인메세지로 코드리뷰를 요정해왔다. 해당 PR이 하루동안 리뷰되지 않았고 그래서 그룹챗에도 리마인드 했으나 너한테 또 얘기한다고. 참을 인 세 번 삼키고 낙씨에게 말했다. 그룹챗에 리마인드 했으면 굳이 나한테 메세지 하지 않아도 된다. 시간이 되면 니 코드를 리뷰하겠다고. 낙씨는 여기에 대한 답장으로 내 인내심을 박살냈다. "사수가 너가말한 방법으로 하지말랬어. 그리고 내 남편이 PR 푸쉬 할 때 마다 테스트 돌아가서 돈이 나간다고 했어. 그러므로 코드리뷰 해주렴". 얘는 윗사람 이름 안쓰면 대화가 안되나? 깃액션 돌리는데 돈나가는게 코드리뷰를 해줘야하는 이유가 될 수 있나? 설령 돈이 문제가 된다 해도 그건 회사가 할 말이지 낙씨가 전할 말은 아니다. 윗사람의 권위를 등에업고 말같지도 않은 이유로 나를 푸쉬하는데에 어질어질한 채로 답장을 적어내려갔다. "너한테 조언해준 방법이 현재 우리가 쓰는 업무프로세스고 누군가 이 방법으로 일하지 말라고 너한테 말했다면 너가 그걸 나한테 전할게 아니라 우리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해결해야 할 일이다. 다른데서 나눈 개인적인 대화를 업무에 끌어들이지 말아라." 그리고 몇 분이 지났을까. 낙씨가 분노를 담은 답장을 보내왔다. 내 메세지에 자기가 상당히 화가나갔다고 얘기좀 하자고. ㅋㅋㅋ 살다살다 회사에서 자기 화났다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또 처음본다. 빡친 낙하산을 상대하는건 내 업무가 아니기에 사수에게 그녀를 토스하고 둘이 대화하는 동안 낙씨에게 답장을 보냈다. "화낼 것 없어. 일을 배워가는 과정일 뿐이야. 시간될 때 말해." 그러나 그날 업무가 끝날 때 까지 그녀는 조용했다. 나중에 사수가 말해주길 낙씨에게 코드리뷰는 그룹챗에 요청하는거라고 개인메세지로 닥달하지 말라고 한마디 했다고 한다. 사수는 얘 원래 이런애라며 너한테만 이러는거 아니니 적당히 무시하고 강하게 나가야 한다는 조언도 덧붙였다. 낙씨가 회사에 버티고 있는 한 회사생활 쉽지만은 않겠구나 싶었다. 돌아이가 없는 회사는 없다지만 낙하산의 경우는 낙하산을 물어온 사람까지 상대해야해서 배고 피곤하다. 다행히 낙씨의 남편이 사리분별을 못하는 사람은 아니라 아직까지 나를 서운하게 한 적은 없지만 이건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으나...ㅋㅋㅋ 다음날(토요일) 낮에 그녀에게서 또 메세지가 왔다. 내가보낸 메세지가 맘에 안들지만 내가 더이상 자기와 대화하고싶지 않은 것 같으니 이말만 하겠다고. 제때 리뷰를 해주면 고맙겠다고. 얘 진짜 뭐지? 뭐라 답해줘야 말귀를 알아들을까... 내 요점은 윗사람 권위 등에업고 개인메세지로 닥달을 하지 말라는건데 전혀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 답장을 보내 그녀를 이해시켜야 할까 아니면 여기에 힘 낭비하지 말고 무시할까 고민하던 찰나 그녀의 메세지가 사라진걸 발견했다. 근데 어떡하니 난 이미 읽었는걸... 그 후로 낙씨는 조용해졌다. 며칠 뒤 사수가 그녀를 재교육하기위해 우리팀 모두를 미팅에 초대해 업무 프로세스를 읊어주고 "우리중 그 누구도 가장 중요한 타스크를 잡은 사람은 없다. 모두의 타스크가 중요하고 모두가 바쁘다. 그러므로 개인에게 쪼는짓은 하지마라." 고 공표했다. 속이 절반만 시원해졌다. 그녀가 낙하산이라는 것과 또다른 눈이 나와 그녀의 관계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하니까. 장점이 단점을 덮어버릴만큼 좋아해 마지않았던 내 회사가 낙씨와의 한판으로 떠나고싶은 회사가 되고있다. 덕분에 앞으로 나갈 좋은 동기부여가 됐다고 생각하련다. 다음 구직시엔 낙하산, 코드리뷰에 관련된 질문을 추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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