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에는 3월 초에 첫출근을 해서 12월 마지막 날 까지 다녔다. 모든것에 '처음' 이라는 단어가 붙었던 첫직장 에서의 한 해는 살면서 접해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인생에 대한 태도도 변하기 시작했다.
저번 편에 입사 후 네달 간 자발적 아웃사이더 생활을 했다고 써놨는데 그렇다고 아무와도 대화를 하지 않은건 아니다. 나와 동갑이었던 사수는 하루종일 조용히 일만하는 나에게 이따금씩 메신저로 한국과 관련된 (주로 북한 이야기ㅋㅋㅋ) 기사들을 공유했다. 함께 일하는 아버지 뻘의 선배 개발자 아저씨도 따듯하게 대해 주셨고 어머니 뻘의 중국인 아주머니도, 큰언니 같은 인도 언니도 궁금한걸 물어보면 발벗고 나서서 도와줬다. 우리팀 앞에는 다른 브랜드의 애니메이션 팀이 있었는데 두 명의 애니메이터 아저씨들이 있었다. 그 중 한 분이 완전 한국인처럼 생겨서 저 아저씨는 한중일 중 하나겠구나 했지만 말레이시아에서 왔다고 했다. 어느날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생일자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려는데 아저씨가 내옆에 와서 '널 위해 사람들이 모인거야' 라고 농담을 했다. 뒤늦게 알아듣고 웃었더니 아저씨가 너는 왜이렇게 조용하니? 하고 물어봤다. 세상 어색하게 웃으면서 'I am shy...' 라고 대답했다. 내가 부끄럼쟁이라는 걸 인정하고싶지 않아서 였을까 1초의 고민도 없이 튀어나온 대답에 스스로 조금 놀랐다. 아무튼 그 날을 계기로 아저씨와 대화를 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이 두명의 아저씨들을 삼촌들 이라고 불렀다. 스스로가 이렇게까지 소심한 줄 몰랐는데 이 네 달 간을 돌아보니 나는 주로 부모님 나이대의 어른들, 그리고 타향살이의 고충을 이해하는 이민자들과만 대화를 나눴다.
네 달째에 디자이너가 입사했다. 영국인인 이 친구와는 당연히 안친해질거란 생각에 대충 인사를 건내고 신경을 끄고 살았다. 시끄러운 애들이 새로 온 애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녔다. 그러다 어느순간 얘가 혼자 점심을 먹는걸 알게되었다. 그리고 이따금씩 나한테 와서 함께 차를 마시겠냐고 물어봤다. '예스'만 할 줄 알았던 나는 당연히 함께 차를 타러 부엌에 갔고 처음 가지는 티타임에 뭘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스러웠지만 티타임 이라는게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부엌에 가서 컵에 티백을 넣고 티를 우려낸 뒤 자리로 돌아갈 때 까지 그 짧은 시간 내에 스몰톡을 나누는 것이었다. 처음엔 이걸 왜 하는거지 싶었다. 그렇게 몇 번 이 친구와 티타임을 가지다 보니 다른 애들과도 어울려 부엌에 가게 되었는데 자연스럽게 융화되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말을 빠르게 하거나 악센트를 못알아듣겠는 사람 또는 내가 모르는 문화가 섞여있는 영국식 농담을 하는 사람이 끼면 그냥 그 자리를 뜨고싶었다. 그래서 슬쩍 빠져나와 내 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처음엔 자리에서 빠지는게 도망치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는걸 알고 그 다음부터는 맘에 안들면 대놓고 도망다니기 시작했다ㅋㅋㅋ.
이 친구와 조금 가까워지고 나서 어느날인가 용기를 내서 함께 점심 먹자고 물어봤고 그 날을 시작으로 우리는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우리팀에 시끄러운 청년들 중에 러시아계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키가 크고 인스타그램에서 자주 보이는 화려한 유럽 '인싸' 같이 생긴 애였다. 얘는 나보다 몇 주 뒤에 입사했는데 친화력이 엄청나서 사무실 내의 모든 이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인싸가 맞았다). 하지만 나랑은 왠지 맞지않아서 일찌감치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내 점심짝꿍도 얘를 그닥 달가워하지 않았다. 공통 관심사 덕에 이 친구와 급속도로 친해졌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으면 우리는 매일 점심을 함께 했다. 세인트폴 주변에 앉아 점심을 해결하고 밖을 거닐면서 상점 구경도 하고 간식도 사먹었다. 한 명의 친구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하니 사무실 안에서 내 표정이 서서히 자연스러워 졌고 아이컨택이 어색해서 깔고다니던 시선을 올려 정면을 바라보니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눈인사를 건내는걸 알고 적잖이 놀랐다.
조금씩 회사생활이 할만 해 질 때 쯤 우리팀 프로젝트매니저가 오더니 다른팀에 한국인 혼혈인 신입사원이 입사했다고 했다. 300명이 일하는 사무실에서 드디어 나 말고 또다른 한국인을 찾은 것이다. 그 친구 자리로 찾아가 인사를 하고 한국말로 대화를 조금 하고 돌아오니 체기가 내려간 느낌이 들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한국인인거 빼면 생판 남인데 대화 조금 했다고 심리적으로 이렇게나 안정이 될 수 있다니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느리지만 나에게도 조금씩 회사 친구들이 생겼고 처음엔 무슨소린지 못알아 듣겠던 업무지시도 사수와 프로젝트 매니저의 악센트에 익숙해 지고나니 이해가 갔다. 내 업무는 주로 HTML과 LESS를 이용해 반응형 랜딩페이지를 코딩해서 사수에게 넘겨 주거나 이미 만들어져 있는 우리팀이 관리하는 여섯개의 웹사이트를 유지보수 하는 것 이었다. 혹시 JavaScript 를 쓰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 회사에서 근무하는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았다. 그 때는 할줄 아는 일만 줘서 좋았지만 나중에 이직을 할 때는 공부를 좀 해둘껄 하고 후회했다. 내 사수이자 팀장인 리드 개발자는 풀스택 개발자였는데 이 친구가 입사하고 얼마되지 않아 우리팀의 대빵이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 뻘의 시니어 풀스택 개발자 아저씨는 사수와 비슷한 일을 하지만 직책만 다른 것 같았다. 경력이 상당한데 왜 팀장을 안하고 시니어로 있을까 궁금했는데 그냥 팀장이 하기 싫다고 했다ㅋㅋㅋ. 인도 왕언니는 php 개발자였는데 이 회사에서 15년을 근무 해 자기는 쓰는 코드만 써서 발전이 없다고 한다. 항상 인도간식을 옆에두고 한입 하라고 권했다. 중국인 아주머니는 초반엔 플래시 개발자였는데 Angular 를 독학해 이 회사에 취직하고 최근에는 React 를 독학중이셨다. 이 분은 집이 멀어서 한시간 일찍 출퇴근 하셨는데 아침에 항상 React 강의를 듣고 계셨다. 사수 빼고 세 명의 개발자들은 CSS와 친하지 않고 사수는 너무 바빠서 내 포지션이 이 팀에 필요했던 것 같다. 프로젝트 매니저가 사수와 함께 일을 받아오면 개발자들에게 분배를 해 주었고 나는 주로 스타일링을 수정하거나 새로운 캠패인을 위해 반응형 랜딩페이지를 만들었다. 업무 순서는 한국에서와 비슷한 구조로 디자이너에게 디자인 파일을 받아 코딩한 뒤 우리팀의 개발자들 중 한명 에게 넘겨주었다. 가끔 디자이너가 손이 부족할 때에는 간단한 디자인 작업을 하거나 캠패인 매니저들이 바쁠때는 대신 캠패인 발행을 하기도 했다.
아침에 부엌에서 집어온 과일들과 차를 한 잔 마시고 업무를 하다가 시간이 되면 단짝친구와 점심을 먹고 졸음이 쏟아질 즈음에 가지는 몇 번의 티타임 그리고 마지막 주 금요일 아침에 회사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먹기위해 줄을 서는게 익숙해 질 때 즈음 6개월 동안의 수습기간이 끝났다. 사수는 항상 그렇듯 120% 긍정적인 칭찬과 함께 축하해 주었다. 이대로 비자 전환만 하면 무사히 자리를 잡게 될 줄 알았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내 워킹홀리데이의 두 번째 고난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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