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영국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할 때 내 머릿속은 서양 회사의 복지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영국의 회사에 다녀보니 실제로 복지가 상당히 후했다. 한 가지 간과했던 점이 있다면 너무 들뜬 나머지 자석의 양극처럼 나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예상치 못했다. 영국에서 펼쳐질 삶의 모습이 눈에 훤히 보였다면 그래도 선뜻 넘어오겠다고 했을까? 그 땐 모르는게 약이었을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오랫동안 꿈꿔온 섬나라의 복지를 누림과 동시에 그로인해 마주하게 된 문화충격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다.
첫직장은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규모가 꽤 컸다. 유럽 곳곳에 지사를 가지고 있는 겜블링 회사였는데 런던 사무실에 300명 정도가 근무하고 있었다. 뻥 뚫린 사무실에 파티션 개념이 없이 양옆만 작은 벽으로 막아놓은 형태의 책상에서 서로 등지고 앉아 일했다.
이 회사에서 첫번째로 내 시선을 사로잡은 복지는 음식이었다. 매일 아침 회사 입구의 부엌에 과일바구니 두 세개가 있었고 거기에 각종 과일이 수북히 쌓여 있다. 바나나, 복숭아, 사과, 배, 자두, 귤이 주로 있었는데 사계절 내내 저 과일들이 보인다. 8시 50분 쯤 출근하면 먹고싶은 만큼 집어갈 수 있지만 9시가 넘으면 상태가 좋지않은 애들만 굴러다니는 걸 볼 수 있다. 우유냉장고에는 항상 가장 작은 사이즈의 우유곽들이 가득 차있는데 고지방, 저지방, 중간지방(?) 이 종류별로 있다. 시리얼에 타먹고 커피머신에서 내린 커피에 섞어 마시고 또 차의 나라이기 때문에 차에도 타 마시고 하다보면 우유가 금방 동난다. 커피를 안마시는 사람으로서 커피머신을 누릴 수 없는게 좀 억울했는데 나중에 사수가 핫초코도 나온다고 알려줘서 신나게 뽑아먹다 배가 많이 나왔다. 한 달에 한 번인지 두 번 금요일에는 네시 반 부터 술을 마신다. 마시고싶은 사람만 마시는것이기 때문에 큰 부엌으로 가서 좋아하는 술을 골라잡아 퇴근할 때 까지 신나게 마시면 된다. 주로 맥주, 화이트와인, 레드와인, 프로세코, 탄산음료 가 놓여져 있다. 부엌에 서서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마시기도 하고 조용히 자기자리로 가지고 와 홀짝홀짝 마시면서 일을 마무리 하기도 한다. 술마시면서 일하는게 처음엔 좀 어색했는데 나중엔 고단했던 한 주를 위로해주는 은근한 맛이 있었다. 매 월 마지막 주 금요일에는 아침식사를 제공하는데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베이컨, 소세지, 샌드위치, 과일 등을 뷔폐처럼 줄을서서 담아먹는데 처음에 열심히 먹다가 나중엔 질려서 잘 안먹게 됐다. 오후가 되면 어떤이들은 남은 베이컨롤을 모아서 안에 베이컨만 꺼내 빵 하나에 때려넣고 토스트 만드는 기계로 눌러서 아주 못되고 기름진 점심식사를 하곤 했다. 이렇게 점심까지 해결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인데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사무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점심을 가볍게 먹기도 했고 다양한 형태의 식단조절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글루틴 프리, 채식주의자 등을 배려한 메뉴도 제공하지만 금방 동나고 없어진다.
두번째는 내가 가장 기대했던 근무시간과 휴가에 대한 문화다. 우선 근무시간은 점심시간 한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에 일곱시간 반 으로 아홉시에서 아홉시 반 까지 출근시간이 유동적이다. 아홉시에 출근하면 다섯시 반 퇴근, 아홉시 반에 출근하면 여섯시 퇴근 이렇게 알아서 눈치껏 조절하면 된다. 출퇴근 거리가 멀거나 아이를 데리러 가야하는 경우에는 팀과 합의해서 한시간 까지 앞당길 수 있다. 첫 회사가 인하우스(그 회사일만 하는) 여서 야근이 없었다. 있다고 해도 최대 오래 해 본게 여덟시 전까지였고 프로젝트 매니저가 나에게 거듭 사과하며 다음날 출근시간을 열시 반으로 미뤄 주었다. 휴가 역시 눈치보지 않고 쓸 수 있었는데 찐 한국인이었던 나는 그때까지 눈치를 엄청 볼 때 여서 쩔쩔매며 7일 휴가를 쓰고 한국에 다녀왔던 기억이 난다. 휴가에서 돌아오자 모두가 벌써 돌아왔냐고 물었다. 나중에 보니 대부분 최소 2주는 쓰는분위기였다. 일 년에 기본으로 23일이 주어지는데 거의 다 못쓰고 남게되어 연말에 몰아서 쓰게된다. 이 외에도 WFH(Work From Home) 이라고 해서 집에서 근무하는 제도가 있다. 누구는 집에 택배를 받아야 하고 보일러 기사를 맞아야 해서 오늘은 집에서 일하겠다는 일들이 비일비재 했다. 조금이라도 아프면 그냥 WFH 라면서 막상 집에가면 일을 잘 안시켰다. 쉬라는 배려였던 것 같다. 그리고 이건 무슨 암암리에 이루어지는 상도덕 같은 건데 휴가를 떠나면서 필요한게 있으면 연락을 하라고 해도 휴가때는 절대 연락을 하지 않는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을 지언정 휴가간 사람은 건들지 않는다. 이 외에도 생일휴가 하루, 봉사활동 휴가 하루를 쓸 수 있다. 봉사활동은 회사에서 분기마다 지원자들을 모아서 가는데 도시농장 일손 돕기, 노인정 가서 음식하기 등이 있다.
세번째는 근무시간과 조금 관련있는 이야기인데 '라떼족' 이 없다. 한국의 조직문화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근무 초반에 사무실에서 부모님 나이뻘의 사람들에게 말을 걸지도 대답을 잘 하지도 못했다. 나보다 한참 어린 친구들 부터 흰머리가 지긋한 어른들까지 모두 친구처럼 지내는게 저들이 친화력이 유독 좋아서겠지 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꼰대문화가 없어서 인것 같다. 우리팀의 몇몇은 총괄팀장이랑 아주 친했는데 아직 서른이 안 된 애들이 40대 중반쯤 된 총괄팀장에게 쌍뻐큐를 날리면서 장난을 치기도 했다. 총괄팀장은 뒤집어 질 정도로 좋아했다. 맡은바 일만 잘 하고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었다. 특히 점심시간 한 시간은 오로지 나 만을 위한 시간이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유독 가방을 매고 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는다. 처음엔 얘들이 조퇴나 외근을 가나보다 했는데 그냥 다 챙겨들고 나가서 밥먹고 놀다오는 거였다. 눈비만 안오면 춥던 덥건 밖에서 밥을 잘 먹는다. 해가 나는 날에는 밥먹고 잔디에 드러누워 오징어처럼 몸을 이리 저리 굽는 회사원들을 볼 수 있다. 점심식사 하면서 술도 잘 마신다. 신기하게도 딱 취하기 전 까지만 마시고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멀쩡하게 일을 한다. 나중에 친해지고나서 나도 함께 한 두잔 마시고 들어와서 일을 하려고 해보니 실내는 더워서 술이 더 오르고 도저히 집중이 안되었다. 너희들은 어떻게 그렇게 조절을 잘 하냐고 물었더니 자기들도 사실은 취기가 오르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거랜다.
가계를 책임져 주는 복지들도 꽤 있었다. 쿠도스라는 시스템이 있었는데 이건 약간 칭찬합시다 같은 느낌으로 누구와 협업을 했는데 만족스러웠다면서 포인트를 선물할 수 있는 제도이다. 서로 칭찬을 주고받다 보면 포인트기 꽤 쌓이는데 이걸로 쇼핑을 할 수 있다. 잘 모으는 애들은 벽걸이티비, 다이슨 청소기, 커피머신 등을 사기도 한다. 이 외에도 회사와 제휴하는 브랜드들을 모아놓은 사이트가 있는데 여기서 주문하면 소소하게 할인을 받을 수 있었다. 브랜드 들은 일상에서 빈번하게 사용하는 슈퍼마켓, 통신회사, 옷가게, 식당 등 이어서 꽤 여러곳에 사용할 수 있었다.
보험혜택도 나쁘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새에 연금보험이 들어져 있었는데 이건 나중에 퇴사하니까 다 돌려줬다. 의료보험도 회사가 부담을 해서 GP에 의존하지 않고 프라이빗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심각한 병이 아니라면 일정금액 이상은 커버가 가능했다. 이 때 치과에 한 번 갔는데 프라이빗의 서비스의 질에 새삼 놀랐다. 처음으로 죄지은 기분 안들고 치과진료를 받았다.ㅋㅋㅋ £280 파운드 정도 나왔는데 전액 커버됐다. 한 동료는 조금만 몸이 안좋아도 회사 앞의 프라이빗 병원으로 바로 달려가 처방전을 받고오곤 했다. 건강한 싱글일 경우에는 혜택의 크기가 커보이지 않지만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다면 아주 요긴하게 쓸 수 있는 프라이빗 서비스이다.
이렇게 잘 짜여진 복지혜택들을 누리면 근무하는 매일매일이 즐겁고 아름다은 날들일 것 같지만 복지가 타국에서 느끼는 '낯설음' 까지 해소시켜 줄 수는 없었다. 입사해서 네 달 동안 입을 다물고 자발적 아웃사이더로 지냈다. 한국에서 코리아패치가 완료 된 외국인 친구들과 영국의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은 실제로 많이 달랐다. 말하는 속도가 상당히 빨랐고 다양한 악센트 까지 섞여 내가 하는 영어와 그들이 하는 영어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기에 문화적 공백이 더해져 가까스로 문장을 알아들어도 그 뒤에 숨어있는 농담을 캐치하지 못해 결국엔 외계어로 들렸다. 이렇게 네 달 간 마음과 입을 닫아버렸다.
다시 점심식사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점심을 누구와 먹건 점심시간에 뭘 하건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첫 회사에서 몸담고 있던 팀은 20대 초중반의 시끌벅쩍한 청년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얘들이 뭉쳐 다니면서 함께 점심을 먹자고 몇 번 권유했는데 따라가는것도 정중히 거절하는 것도 나에게는 스트레스였다. 따라가면 말귀를 못알아들어서 소외감이 느껴지고 안따라가면 겉보기엔 비슷해보이는 나이대인데 항상 동떨어져 있는 나에게 왜 따라가지 않느냐고 묻는 어른들 눈에 내가 왕따같아 보일까봐 신경이 쓰여서 또 싫었다. 그렇게 점심시간, 티타임, 파티 등등 초대받는 족족 도망다녔다. 물어봐줘도 부담스럽고 안물어봐주면 소외감 느껴지고 지금 생각해봐도 어쩌라는건가 싶은 요상한 심리상태였다. 내 뒤로 팀에 합류한 또래들은 나보다 두세살 씩 어렸고 유럽인이거나 영국인이었다. 그래서인지 신입의 수줍음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항상 대화에 끼려고 노력했고 함께 식사하러, 담배 피우러, 술 한잔 하러 몰려다니더니 급속도로 사람들과 친해졌다. 친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이 가벼운 모임들이 나에게는 더 큰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불편한 요소들 이었다.
스스로를 그렇게 자책하다가 입사 네 달 째에 새로운 동료가 들어왔는데 이 친구를 만나고서 내가 영국인들과 안맞는게 아니라 우리팀의 젊은이 그룹이 나랑 안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국인인 이 친구에게도 그들은 불편한 존재였던 것이다. 친구가 생겨 닫았던 마음을 조금씩 열고 고개를 들어보니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향해 문을 열어두고 있었다. 그 이후에도 여전히 수줍음쟁이 였지만 처음 보다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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