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있을 때에는 한 직장에 머문지 6개월이 넘어갈 때 즈음 권태감이 몰려와 1년을 채우는 시점에 이직을 생각하곤 했었다. 첫 직장에서 6개월 간의 수습기간을 채운 후 역시나 일이 익숙해지면서 지루함도 함께 찾아왔는데 이때의 나 에게는 취업비자를 따서 영국에 정착하겠다는 원대한 꿈이 있었기에 권태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 정말 역마살 이라는게 있는걸까 평화롭던 8월의 어느 날 일이 터지고 만다.
어느 날 오후 아주 높은 포지션에 있는 임원급 직원이 우리팀을 방문한다고 했다. 회의실로 우르르 들어가니 온몸에서 기품이 뿜어나오는 중년여성이 모두를 미소로 맞아주었다. 돌아가면서 이름과 포지션, 근무기간 등을 자기소개 비슷하게 말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토할것 같이 떨렸지만 내 차례가 되자 이건 꼭 해야만 한다는 직감이 와서 울렁증을 누르고 내 소개도 무사히 마쳤다. 그 임원은 인자한 미소로 여성들이 중요한 직책에 있어서 보기좋다며 더 열심히 일해달라고 하고 그렇게 떠났다.
며칠 뒤 평소와 같은 아침, 느긋하게 하루를 시작 하려는데 우리팀이 속해있는 마케팅 팀의 총괄팀장이 전체회의를 소집했다. 전체회의라니! 무슨 재밌는 일이 일어날까 하고 괜히 들떴다. 회의실로 가는 길에 점심친구가 느낌이 좋지 않다고 했다. 얘는 왜 이렇게 부정적일까? 생각하며 회의실에 들어갔다. 임원 아주머니가 오셨을 때 모였던 인원이 모두 모였다. 그 가운데 마케팅 팀 총괄팀장이 어두운 얼굴로 뭐라뭐라 말하는데 나는 그때까지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알아들은 것은 '팀에 구조조정이 있을 것이다' 정도였는데 말 그대로 팀 구조를 바꾸는 줄로만 알았다. 오늘 안에 개인을 모두 면담 할 것이고 면담하면서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겠다고 했다. 자리로 돌아오면서 사람들 얼굴이 충격 또는 상한 음식을 먹은 표정이었는데 모두가 입에 달고있던 한 단어가 'redundancy' 였다. 리던던시 리던던시 이게뭘까? 점심친구가 충격받은 가운데 나에게 다시 무슨일이 일어난건지 쉽게 설명해 주었다. 그제서야 리던던시가 해고 라는 뜻인걸 알게 되었다. 그 때 까지도 에이 개발자를 왜 자르겠어 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 분위기는 우중충 했고 사람들은 자리에 돌아와서도 웅성거리며 업무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 두명 씩 회의실로 불려가고 봉투를 하나씩 들고 돌아오거나 맨손으로 돌아왔다. 점심시간 직전 내 차례가 되어 인도언니와 중국인 아주머니, 나 이렇게 셋이 회의실로 들어갔다. 무슨 슈퍼스타K 처럼 우리 셋을 책상에 앉혀놓고 총괄팀장이 유감이라며 너희 셋 다 해고대상이라고 했다. 여기 봉투에 담긴게 퇴직금 비슷한 보상금액이고 니가 원하면 사내의 다른팀으로 지원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했다. 그러더니 우리 셋 중 근무성적이 좋은 한 명은 12월 까지 근무하고 나머지 둘은 9월 까지만 근무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까지 듣고 회의실을 나왔다. 설마가 사실이 되었는데 실감이 나지 않았다. 5개월 간 나를 우울의 구렁텅이로 떠밀었던 악몽같은 취업시장에 다시 뛰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거기에 사막에서 바늘찾기 격인 취업비자를 지원해 줄 회사를 찾아야 한다는 압박이 더해져 도무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자리로 돌아와 보니 우리팀 자리는 이미 반 이상이 비어있었다. 다들 말 그대로 멘탈이 붕괴되었다. 모두가 회의실에 한 번 씩 다녀오고 나서 40명 전체를 통틀어 다섯 명 정도가 살아남고 나머지가 모두 직장을 잃었다. 해고통보를 했던 총괄팀장도 해고됐다.
이 날 이후 나는 CV를 재정비 하고 포트폴리오 사이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영국에서의 근무경험과 추천인의 증언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사수와 매니저에게 추천인이 되어달라고 부탁해 두었고 사수와의 미팅에서는 사내에 다른팀으로의 부서이동도 알아봐 달라고 했다. 근무기간과 연봉 그리고 스펙도 내가 제일 낮기에 당연히 9월까지만 근무하게 될 거라 생각하고 빡세게 취업준비를 할 태세였는데 애니메이션 팀의 삼촌이 '두고봐라 가장 싼 놈이 살아남는다' 라고 던진 말이 사실이 되었다. 어느날 퇴근하고 회사에서 전화가 와서는 '세 명의 개발자 중에 너의 퍼포먼스가 가장 뛰어났다 그러니 너는 12월 말 까지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라고 했다. 석달의 시간동안 돈 걱정 안하고 취업준비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뛸듯이 기뻤다. 나중에 중국인 아주머니와 인도언니가 이야기 해 주었는데 둘은 이 회사를 다니는 동안 수도없이 정리해고를 봐 왔기 때문에 얼마 전 회사가 다른회사와 합병하는 것을 보고 정리해고를 예상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인도 언니는 15년 근무경력에 40세 이상 이라는 기준이 더해져 해고 시 퇴직금이 어마어마 했기에 해고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고 한다ㅋㅋㅋ.
해고통보를 받았지만 석 달 이라는 시간이 더 주어져 당장 취업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대신 우리팀 왕언니들 두 분의 취업을 생생히 지켜볼 수 있었다. 둘은 몇 주 간 쉴 새 없이 인터뷰 관련 전화를 받고 코딩테스트를 했다. 결과적으로 둘은 아주 잘됐다. 중국인 아주머니는 급여의 1.5배를 더 받고 주3회 사무실 출근, 나머지 이틀은 재택근무가 가능한 스타트업에 들어가고 인도언니는 아도비 개발자가 되었다. 시니어 개발자 아저씨는 회사의 농간에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정리해고가 있기 몇 달 전 어느날 갑자기 아저씨가 가방을 챙겨서 나갔는데 전체 해고 전 아저씨만 따로 정리해고를 한 것이었다. 몇 주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아 아저씨가 휴가를 간 줄 알았는데 나중에 중국인 아주머니가 말해주셨다. 아저씨는 연봉도 높고 근무경력이 인도언니보다 길어서 해고 보상금이 더 많았는데 회사에서 보상금 지불을 하지 않기위해 이것 저것 이야기를 짜 맞추어서 아저씨의 업무태도 불량을 이유로 해고를 했다. 그렇게 9월 말엔 나와 사수를 제외한 우리팀 개발자들이 자리를 비웠다.
정리해고의 이유는 얼마전 이루어진 합병 이었다. 겹치는 인력 중 세금이 저렴한 지점에 근무하는 인력만 남겨두고 다 잘라버린거다. 그 사무실은 스페인에 위치한 영국령 지브롤타 인데 해고된 이들에게 여기로로 옮길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하지만 정규직 기회를 잡기위해 계약직 직원 한 명만 부서이동을 신청하고 나머지는 가지 않았다. 합병을 계기로 우리팀은 쓰던 플랫폼을 아도비에서 오라클로 바꿔야 했다. 어차피 관둘거 배워서 뭐하나 싶었다. 그렇게 꾸역꾸역 새 플랫폼에 익숙해져 갈 무렵 연말이나 연초에 타 팀에 자리가 날거라는 소식이 들렸다. 당연히 인터뷰를 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11월, 슬슬 취업준비를 시작했다.
시스템 이전으로 인해 사수와 남은 인력들은 조금 바빴지만 내 업무는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고맙게도 사수는 이제 바쁜게 없으니 구직도 시작할 겸 사무실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2주 간 재택근무를 하라고 해서 딱히 친구도 없고 여가생활도 없었던 나는 그나마 사람들과 붐빌 수 있는 사무실에서 일하는게 더 좋았지만 그래도 나름 주어진 호사를 누려보고자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빨리 두 번째 직장을 구했다. 인사팀에서 연초에 타팀에 자리가 날 것인데 그래도 굳이 떠나고싶냐길래 너희들을 믿을 수 없다고 대놓고 말할 수가 없어서 그리고 말실수 할까봐 1차원 적으로 내 의사를 표현했다. '나는 보상금을 받고 떠나겠다' 고 했다ㅋㅋㅋㅋ.
12월의 마지막 날 노트북을 반납하기 위해 텅 빈 사무실로 들어갔다. 마침 런던에 있던 사수가 점심을 함께 먹자면서 사무실로 왔다. 얘랑은 마지막 날 까지 어색했다 ㅋㅋㅋ. 사무실 1층에 있는 무한리필 피자집에 갔는데 마지막으로 점심을 사주고 싶었다고 했다. 정말 너무나 고마운데 둘이서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적이 없어서 어색해 죽을 뻔 했다. 정말 고마웠다고 거듭 인사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런던에서의 나의 첫 직장을 떠났다. 겉보기에는 회사에 정이 없어보였을지도 모르지만 나에게 이 회사와 사람들은 너무나도 특별하고 소중한 추억이다. 아직도 이 회사를 생각하면 많이 애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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