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직장에 대해서는 할 말이 아주 많으니 두세번에 끊어 써야겠다. 다섯달의 구직기간을 거쳐 얻은 런던에서의 소중한 첫 직장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는 과정의 서막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짜릿하고 신선한 충격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서구문화에 나름 깨인 여자라는 자부심을 갖고 영국에 넘어온 내가 뼛속까지 유교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합격통보를 받을 때 첫출근 날짜를 물어보길래 나는 지금 당장도 일할 수 있다고 강하게 어필했지만 회사에서도 새 직원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과정이 필요하다며 일주일 뒤로 첫출근 날을 정해주었다. 그 동안 내 이름으로 된 노트북과 각종 장비들을 배정하고 인사기록에 내 정보들을 추가하는 일 등등을 한 것 같다. 내 소중한 첫 직장에서의 원활한 생활을 위해 뭘 준비할 수 있을까 곰곰히 생각을 해봐도 일주일 안에 영어가 늘 리도, 생전 안써보던 프로그래밍 언어를 마스터 할 리도 없었다. 그저 긴장하면서 하루 하루 손꼽는 것 이외에는 할 게 없었다. 혹시 모르니 노트북을 들고오라는 말에 내 2009년산 맥북을 넣어 갈 노트북 가방을 급히 사고 H&M에 가서 최대한 예의는 갖추되 캐쥬얼한 셔츠를 몇 장 샀다.
대망의 첫 출근날이 되었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부딪혀야만 하는 그 날이 오고 만 것이다. 첫날이라 열시까지 출근을 했다. 나는 아직 출입카드가 없어서 리셉션에서 면접 때 만난 개발팀장을 호출 해 함께 들어갔다. 얘는 190m 정도 되는 큰 키에 말도 걸음도 정말 빨랐다. 잘 지냈냐 기분이 어떠냐길래 긴장된뎄더니 긴장하지 말라면서 면접 때 미처 못본 통로로 쭉 안내해주길래 걸어 들어가다 보니 뻥 뚫린 사무실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되었는데 사무실 안에 책상이 200-300개 정도 있다고 했다. 설마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와 인사를 하게 되는걸까 했는데 우리팀이 일하고 있는 브랜드의 팀원들에게만 인사를 하면 되었다. 그래도 한 30명이랑 악수하면서 통성명을 하고 다닌 것 같다. 긴장을 해서 였을까 아니면 서양인 눈에 동양인 얼굴이 다 똑같아 보이듯 내 눈에도 그래보이는 걸까 얼굴도 이름도 뒤돌아서니 다 잊어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나 까지 6명으로 이루어진 우리팀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는데 그땐 그사람들이 뭐 하는 사람들인지, 우리팀인지 아닌지 모르고 넘어갔다. 자리에 앉으니 첫 면접때 본 프로젝트매니저가 옆에와서 프로젝트 매니징 툴과 메일 등을 알려주었고 개발팀장이 작업에 쓰일 프로그램들을 알려주었다. 얘가 내 사수라고 했다. 앞이 막막했다. 말을 하나도 못알아듣겠는데 나를 뽑아준 이 천사같은 애랑 일을 하다 내 영어가 똥망인게 들통나면 어떡하나 벌써부터 걱정이 몰려왔다.
이전 프로젝트들을 보고있으라길래 머리에 안들어 오는걸 꾸역꾸역 읽고 있는데 열한시가 조금 넘으니 누가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첫출근 하는 뉴비들을 위해 회사에서 정해준 친구가 있는데 걔가 바쁘니 자기가 걜 대신해서 나와 점심을 먹으러 가겠다는거다. 고마운데 난 너가 누군지 모른뎄더니 너 뒤에있는 빨간머리라고 해서 빨간머리와 그녀의 친구 이렇게 셋이서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 날의 점심 시간은 머리에서 지우고 싶다. 표면적으로 드라마틱한 일은 없었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막장드라마 급으로 심장이 두근대는 시간들이었다. 사무실이 위치한 건물은 1-2층에 음식점과 쇼핑몰이 있었다. 얘들이 거기로 날 데려가 구경시켜주면서 먹고싶은걸 고르라고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혈관이 긴장으로 꽉 차있는 내가 뭐가 먹고싶겠니 얘들아... 결국 추천받은 가게에서 부리또를 하나 집어들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사무실에 큰 부엌이 있었는데 거기로 갔더니 처음보는 애들 두 세명이 내옆에 애들을 반겨주었다. 자연스럽게 그들과 합석을 하게 되었고 뒤이어 나를 챙겨야 했던 친구도 맞은편에 앉았다. 부리또가 코로 들어가는지 눈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고 먹었다. 배가 차서 멀뚱멀뚱 애들 대화하는걸 보다 아이컨텍 하면 알아듣는 척 하하 웃고 간혹가다 나에게 던져지는 질문들에 당황스럽지만 최선을 다해 대답했다. 별거아닌 질문들 이었는데 시선에 나에게 집중되다 보니 내가 어디 사는지, 어떤 한국음식이 맛있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간단한 대화였는데도 너무 괴로웠다. 한시간에 걸친 악몽같은 점심시간이 지나가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니 프로젝트매니저가 일을 줬다.
일을 하려고 보니 내 컴퓨터에는 작업을 위한 권한이 없어서 사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사수는 홍길동처럼 동에번쩍 서에번쩍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그래서 맞은편에 앉아있는 가장 친절해보이는 아저씨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 분이 우리팀에서 가장 오래 일한 대빵격의 풀스택 개발자였다. 한국에서는 내 부모님 나이대의 개발자는 본 적도 없을 뿐더러 있어도 다 총괄 피엠으로 일하는 것만 봐왔기에 이 분의 존재는 충격적이었다. 뚝딱거리는 내 영어를 너그러운 미소와 함께 이해해 주시고 존재 자체만으로 왠지 아버지 같아서 아저씨가 맞은편에 앉아있기만 해도 긴장이 덜했다. 그렇게 일을 하다보니 다섯시 반이 되기 15분 전 부터 한 두 명씩 퇴근을 하기 시작했다. 9시 부터 다섯시 반 까지 근무인건 아는데... 십오분 전에 저렇게 집에 간다고? 여기서 한 번 놀랐다. 뒤이어 자리를 뜨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떠나면서 우렁차게 '씨유 투머로우!!!' 또는 '해버 나이쓰 이브닝!!!!' 을 외치고 가는것에 한 번 더 놀랐다. 아 나도 해야하나...? 죽어도 못하겠는데 어쩌지 하면서 고민하다 보니 여섯시가 되었고 마침 우리 팀 프로젝트 매니저가 떠날 채비를 하면서 집에 안가냐고 묻길래 당장 가방을 챙겨 따라나섰다. 그렇게 첫 출근날이 지나갔다.
집에 오니 배도 안고팠고 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친구들이 처음 출근하면 몇 달 정도는 녹초가 될거라고 했는데 첫 날은 녹초가 되기 보다는 온 몸의 신경세포가 마비가 된 것 같았다. 내가 배가 안고프다니...긴장을 더럽게 많이 했었나보다. 눕자마자 내일을 걱정 할 틈도 없이 기절하듯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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