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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살이/다시 직장인 2022

[일상] 재택근무의 일상화, 디지털 노마드의 삶

종종 흰머리가 드문드문 난 중년의 내가 일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있다. 딱 경험한 만큼만 담아낼 수 있는걸까, 상상 속 배경은 주로 사무실 책상이다. 그 속에서 출퇴근 전쟁 이라고는 모를 것 같은 순수한 얼굴을 하고는 여유롭게 장소를 옮겨다니며 일하는 디지털 노마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디지털 노마드 라는 단어 자체를 그저 실리콘밸리의 인재들만 누리는 혜택이라 생각하고 살았으니까. 그런데 그냥저냥 평범한 개발자인 내가 그 삶을 살고있다. 코로나가 후려치고 간 흔적이라고 봐야할까? 구직 당시 훑어 본 대부분의 회사가 유동적으로 재택근무를 허용했고, 현회사 역시 전직원의 20%만 주 2회 정도 사무실을 오가며 일한다. 이 회사도 초반에는 사무실 근무가 디폴트였으나 여느 회사들이 그렇듯 이곳 역시 코로나의 여파로 강제 재택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핵심 멤버들이 런던을 떠났기 때문일까 모든 규제가 완화된 지금도 사무실 출근을 강요하지 않는다. 첫 출근을 재택으로 하면서 내가 돈을 벌고 있는게 맞나 싶은 어색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금새 적응 되었고 그로인한 삶의 질 상승으로 올 해 꽤나 큰 혜택을 봤다. 1년 조금 못 된 기간동안 느낀 재택근무의 멋짐을 몇 자 적어보려 한다. 

 

 

 

노트북과 충전기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어 

근무장소에 제약이 없다 보니 미팅을 하다보면 간혹 동료들이 영국 밖의 나라에서 일하고 있는것을 목격하게 된다. 한 번은 동료의 온라인 미팅 배경이 야자수 인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따로 설정한 배경이 아니라 진짜 야자수였다. 나름 미지근 했던 영국의 여름과는 차원이 다른 따듯한 나라의 해를 등지고 바캉스 차림으로 일하는 기분은 어떨까? 동료를 본보기 삼아 나도 내년에 해보려고 한다. 끝나자마자 달려나가 수영하고 바베큐를 굽겠어. 나라 뿐 만 아니라 공항, 차 안 등 장소또한 다양하다. 나역시 휴가를 아끼기 위해 이사 중 달리는 기차 안에서 일을 한 적이 있는데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 중요한 미팅이 있지 않다면 인터넷 끊김에 대한 걱정이 없기 때문에 기차 안의 와이파이로 충분히 업무가 가능했다. 

 

 

 

이삿날 오전, 텅빈 방바닥에 주저앉아 전날 먹고남은 피자로 끼니를 떼우며 일하고

 

같은 날 오후엔 기차를 타고가며 일했다 ㅋㅋ

 

 

 

너 맘대로 하루에 8시간만 채워

영국 내에서 일을 하는 동료들도 종종 병원에 가거나 택배기사를 맞이하는 등 다양한 이유로 부재중일 때가 있다. 처음엔 업무중에 이래도 되나 싶었으나 하루 8시간 근무만 지킨다면 그게 꼭두새벽에 두 시간, 한밤 중 여섯시간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말을 듣고 이해 완료. 빠르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책상에 앉아 일찌감치 근무를 시작 해 오후 네,다섯시 즈음 끝내고 이른 불금을 보내거나 때에 따라 조금 긴 점심시간을 보내는 등 상식선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8시간을 채우며 일하고 있다. 하지만 이 유동성은 한국에서 그 진가가 더욱 빛나게 된다.

 

 

 

나의 디지털 노마드 적응기 

아무리 회사에서 편하게 하라고 했다지만, 그 유동성의 허용범위가 K노비 출신 외국인으로서는 잘 파악이 되지 않았다.(사실 지금도 조금 아리까리 하다.) 그래서 프로베이션 기간 동안 부지런히 동료들을 관찰하고 그 범주를 넘지 않는 선에서 재택근무를 활용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난 후 내 나름 선을 한번 쎄게 넘어봤다. 한국에서 두 달 간 근무해보기로 한 것이다. 몇 주를 고민하고 이내 작성한 장문의 이메일이 무색하게 회사는 absolutely fine 이라며 흔쾌히 허락했다. 감사히 받아먹기로 한다(사장님 계신 곳을 향해 마음속으로 큰절). 어차피 다들 온라인으로 만나지만 물리적으로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 일하는 게 초반에는 꽤나 긴장됐다. 그래서 왠만하면 영국시간과 겹치게 일했고 (예를들면 한국시간 오후 3시에서 밤 12시) 어떤 날들은 오전에 두시간 일해 두고 오후에 신나게 놀고 저녁에 여섯시간을 채우기도 했다. 시차와 거리가 장애물이 되어 업무 퍼포먼스를 헤치지 않는다는걸 보여주기 위해 일당백을 하려는 노력도 덧붙였다. 두 달을 지내본 결과 이런 형태의 근무가 꽤나 할만했다. 굳이 불편한 점이 있었다면 밤늦게 집중력이 떨어지는 아침형 인간이 자정까지 일을 하자니 가끔 머리가 멍해지는 것 정도? 한국 시간으로 일해도 된다고 회사에서 편의를 봐줬지만 낮에 할 일이 많았기에 내린 결정이니 여기에 대해선 굳이 불평할 이유가 없다. 두말 하면 입아플 가장 좋은 점은 휴가를 아끼면서 가고싶은 곳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재택이 불가능했다면 한국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휴가를 몰빵한 2주 정도가 다였을거다. 한국에 다녀와서 보스들과 미팅을 잡아 한국 재택근무에 대한 피드백을 요청했다. 그들은 내가 영국에서 일할 때와 한국에서 일할 때의 차이를 거의 못느꼈다고 한다. 그저 열두시에 깨어서 일하는게 조금 안타까웠다고 시간을 더 분배해서 사용해도 좋다고 했다. 고로, 내년엔 더 많이 돌아다니면서 일할거다. 재택근무 너무좋다 최고 항상 짜릿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