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에서 드림위버와 플래쉬로 홈페이지를 만드는 수업을 들을 때 흥미도가 -1000 이었다. 이 생소한 프로그램의 하나부터 열까지 내 뜻대로 되지않는게 답답했고 짜증이 솟구쳤다. 전공수업 중 웹과 관련된 수업이 이거 하나라 다행이라 여겼으니 미래의 내가 개발자로 살아가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적이 없고 그저 하루하루 개성을 뽐내며 살아가는, 크리에이티브한 디자이너가 되어있을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땐 디자이너로서의 삶이 어떨지 정확히 모르고 단어 자체에서 풍기는 뽕에 취해 겉멋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앞날에 대한 뚜렷한 계획이나 열정 혹은 고집같은 것 없이 어찌저찌 현재의 삶으로 흘러들어 오다보니... 내가 개발자가 되어있네?
개발자라 하면 십대 때 부터 코딩에 관심을 갖고 수학을 잘하고 또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사람들이 떠오르는데 수포자에 컴퓨터언어 공부를 정규수업에서 공부 해 본 적 없는 내가 개발자로 먹고살고 있다니. 쓰고 있는 지금도 신기하다. 게다가 이젠 짬밥이 좀 쌓여 중급 개발자가 되었고 시니어로 올라갈 기회를 노리고 있다. 일은 손에 얼추 익고 여전히 삽질하는 날들도 많지만 예전보다 심적으로 덜 쫄려서 나는 어떤 개발자이고 또 어떤 개발자가 되고싶은지 짬짬이 생각할 여유가 생긴다.
꽤 자주 스스로가 가지고있는 기술과 지식에 대해 부족하다 생각한다. 아무리 난다긴다 해도 모든 프로그래밍 지식을 다 아는 사람은 없을건데 어떤 사람은 모르는 것에 당당하고 어떤 사람은 또 나처럼 시도 때도 없이 쫄려한다. 25년차인 내 사수도 매일이 배움의 연속인데 내 경력에 모르는게 많은건 당연한 건데도 그렇게 쫄릴 수가 없다. 쫄리는 이유를 비전공 백그라운드로 돌려본다. 부트캠프를 수료하고 직업을 바꿔 개발자가 된 지인들과 이야기를 해봐도 비슷한 반응이 나온다. 대학에서 프로그래밍을 전공한 사람들 보다 비전공 출신들이 더 아등바등 열심히 배우고 살아간다고. 우리회사만 해도 리드들 빼고는 다 부트캠프 수료 후 취업한 개발자들이 근무하고있다. 나는 조금 특이한 케이스지만 나도 어찌보면 비전공자다. 대학원에서 컴퓨터 사이언스 석사를 수료 했으나 이 마저도 데이터 분석에 가까웠고 개발 이론이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에 대한 수업은 없었다. 딱 하나 현업에서 써먹고있는 아자일은 배웠다.
프로그래밍이 진입장벽 자체가 높아서 개발자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내가 뭘 하고있는지 이 코드가 왜 안돌아가는지 (또는 왜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 꽤 자주 직면하고 그럴 때 마다 하찮은 지식이 탄로나 도망치고싶다 (실제로 책상에서 침대로 잘 도망친다). 하던일을 관두고 다른 분야로 직업을 바꾸게 되면 그 분야에 대한 자신의 무지함과 마주하게 되는데 전에 일하던 직종에서 쌓은 경력이 많을수록 이 때의 타격이 커지는 것 같다. 세상에 쉬운일은 없다지만 이쪽일은 언변으로 대충 얼버부릴 수가 없어 더 적나라하게 나의 무식이 탄로난다. 그렇게 도망친 침대에서 한참 멍때리고 누워있다 가까스로 일어나 다시 머리를 부여 잡아보고 그렇게 며칠을 같은 페이지만 보다 보면 어느 순간 대충 보고 넘긴 코드가 읽힌다. 다음 프로젝트로 넘어가면 또 생소한 페이지와 마주하고, 휴가라도 다녀오면 그새 리셋된 뇌를 부여잡고 다시 익숙해 지기를 반복하다 보니 요즘은 나답지 않게 꽤 오래 책상에 앉아 있어 침대에 도망치는 횟수가 줄었다. 찐 너드 처럼 취미로 개발지식을 쌓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지만 나처럼 조금 다른 방향으로 프로그래밍에 맛을 들일 수도 있다는걸 최근에 알아가기 시작했다. 이바닥에 어쩌다보니 흘러들어온 것 처럼 머릿속 지식도 어쩌다보니 조금씩 쌓여가고 있나보다. 그러다 보면 25년차엔 나도 왠만한 삽질은 두루 경험해 해탈해 있지 않을까. 비전공자 출신이란 딱지는 이 시기에 느끼는 불안감을 둘러대기 적절한 핑계인 것 같고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애매한 미드레벨을 넘어서 팀을 리드할 수 있는 시니어가 되기위해 갖춰야 할 키를 찾는건데, 그러기 위해선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 내년에 집중적으로 탐험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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