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온지 어언 6년이 되었다. 어찌보면 이민사 라고 하기 민망한 기간이지만 한국에서 교육을 받고 사회생활까지 하다 온 사람에게 이 시간은 가치관을 비롯한 생활습관 전체를 뒤바꿀만큼 긴 기간이기도 하다. 영국에 오기 전 혹은 영국에 온 첫 해의 내 모습과 현재의 내가 얼마나 다른지 종종 생각해보곤 하는데, 이민 초창기에 기세등등했던 내 태도가 어이 없어서 웃음이 나오곤 한다. 처음 영국에 와서 호구짓이라 생각했던 몇몇가지가 이제는 내 생활에서 떼어낼 수 없는 일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1. 5파운드 주고 김밥(같지않은 김밥) 사먹기
런던 밖에서 김밥을 찾기란 쉽지않다. 그나마 대도시에 한식당이나 프렌차이즈 한국마트에 가면 김밥을 팔기도 하는데 일단 가격이 비싸다. 한국이 아무리 물가가 올랐다 하지만 여기서는 김밥천국에서 한 줄 포장해서 먹는 금액의 두 배 이상을 내야 특별할 것 없는 혹은 어딘가 애매한 김밥을 살 수 있다. 그리고 냉동실 혹은 냉장고에 머물러있어서 차갑다. 너무너무 차갑고 맛없는 김밥이다. 런던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김밥을 접할 기회가 많아지기는 하지만 퀄리티는 여전히 좋지 못하다. 단무지가 무조건 들어가긴 하는데 시금치 대신 상추, 계란대신 버섯 등 요상한 재료들을 넣고 돌돌말아 누가 그렇게 꽉꽉 누른건지 김이 떡져서 찬 밥에 착 붙어있는 모양새다. 처음 왔을 땐 그까짓 김밥 내가 싸고말지 하면서 직접 만들어 먹었으나 이젠 그 마저도 지치고 한 번 말면 재료를 다 소진해야 해서 김밥감옥에 몇 번 갇히고 나서는 원기둥모양 밥에 김만 말아져 있어도 감사히 사먹게 된다. 그래서 한국에 들어가면 가장 먹고싶은 음식이 김밥천국 김밥이다. 오랜만에 한국에서 지인들과 만나면 특별한 날이니 좋은걸 대접하겠다며 서양식당이나 요즘 힙하다는 식당에 나를 데려가곤 하는데 사실 가장 먹고싶은건 김밥천국 야채김밥이다. 그래서 지나가다 김밥천국만 보이면 들어가서 한 줄 사서 걸어가면서 먹는게 한국에의 소소한 낙이다.


2. 점심으로 간단히 샌드위치 혹은 샐러드 먹기
나는 먹는게 낙인 사람인데... 첫 영국회사에 입사하고 얘네들이 점심으로 먹는 음식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몇몇은 집에서 요리한 파스타 같은걸 가져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몇 입 베어물면 없어질 얇은 샌드위치나 샐러드를 사와 대충 입에 우겨넣는걸로 점심을 해결했다. 이런 부류는 그나마 양반인 것이, 마트에서 사이드 디쉬같이 생긴 작은 코울슬로우 비스무리 한 손바닥만한 샐러드를 사 와서 먹는 애들도 있다. 다이어트중인 줄 알았으나 집에가서 저녁을 뽀지게 해먹는다고 한다. 그냥 점심식사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다들 하길래 나도 몇 번 따라해 봤으나 재료 본연의 맛만 있는 샌드위치는 맛으로나 양으로나 하루의 낙이 되어주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열심히 볶음밥, 김밥, 파스타 등등 이것저것 만들어서 도시락으로 챙겨가 보기도 하고 밖에 나가 사먹기도 했봤으나 결국 뭘 먹어도 맛이 없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건데 뭘 먹어도 맛없고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던 건 향수병의 일종이었던 것 같다. 보상심리로 한국에 방문할 때 마다 좋아하는 음식들을 다 먹고 가겠노라며 배가 터지게 먹었지만 돌아오는건 급성 위장염 이었다. 그동안 영국의 이 심심한 음식들에 위장이 익숙해져 버렸나보다. 좋아해 마지않던 음식들이 주는 고통이 먹을 때의 기쁨보다 커지다보니 알아서 흥미가 떨어지고 그래서 몸에 무리가 안가는 음식들을 찾아먹다 보니 요즘은 몇 해 전까지 입에도 안 대던 샌드위치들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정서적으로도 안정이 되어서 먹는양이 많이 줄었다. 식사메뉴에 목숨걸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티, 샌드위치, 샐러드 다 맛있다. 치즈를 엄지손가락 만큼 떼어서 한입에 먹는건 아직 못하겠다.


3. 서서 술 마시기
안주를 시켜놓고 의자에 앉아 술을 마시는 문화가 몸에 깊게 베어있어 영국에 처음 왔을 때 펍에 자리가 없으면 나와서 앉을 자리가 있는 펍을 찾아다녔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 이태원의 펍에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이 때도 서서 술마시는게 세상 어색해서 눈알 빠지게 테이블들을 스캔했었다. 그만큼 서서 술마시는게 너무 어색했다. 한 손은 술병에 다른 한 손은 뭘 해야할지 몰라 덜렁덜렁 몸통 옆을 떠돌고 있기 일수였다. 이 역시 양국 회사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익숙해지게 되었다. 두번째 회사에서 술에 절기 직전인 알콜러버들과 한 팀에서 일했는데 주 3회 정도 듣는말이 grab a pint 였다. 별 생각없이 따라간 펍은 야외임에도 이미 사람들이 바글바글했고 앉을자리는 고사하고 스탠딩 테이블도 이미 다 주인이 있었다. 얘네 어쩌려고 이러나 하면서 내가 얼래벌래 하는 사이에 동료들이 바에서 술을 가져와 내 손에 쥐어줬다. 다들 그자리에 서서 발 사이에 가방을 내려놓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아 이렇게 하는거구나 ㅋㅋ. 돌아가면서 술을 사 받아마신 파인트가 하나, 둘, 셋 비워지는 동안 사람들도 줄어들었다. 한 잔만 마시고 집에가는 동료, 두 잔 마시고 가는 동료, 끝까지 남아있는 동료들. 그 중에 가지말라고 아쉬워 하는 사람 혹은 잡는다고 붙잡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어쩜 저리 맺고 끊고가 확실한지. 한 잔 깔끔하게 비우고 애 보러 가야한다며 떠난 동료가 펍에서 소요한 시간은 대략 30분 정도였던 것 같다. 회식자리에서 가지마라~ 한잔만 더 해라~ 붙잡고 잡히고 도망가던 나의 한국회사들과는 달라도 많이 다른 모습이다. 가는사람 안붙잡는 문화여서 그런것도 있겠지만 아마 서서 마셔서 집에가기 더 깔끔한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서서 마시는게 익숙해지고 나니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어지고 참새 방앗간 들르듯 펍에 들락거릴 수 있어 세상 편하다. 요근래 식사할 때 말고는 펍에 앉아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4. 아침식사로 오트밀 포리지 (귀리죽) 먹기
점심으로 집에서 삼계죽을 만들어 간 적이 있다. 동료가 그걸 보더니 Congee가 아니냐며 자기네도 비슷한 Porridge 라는게 있다고 했다. Congee는 중국 죽 이므로 틀렸고 포리지는 처음 들어봤으나 영어로 죽 일 것 같고 당연히 쌀죽이라 생각했다. 그러고 얼마안 가 사람들이 아침으로 국그릇 같은데 담아먹는 찐덕찐덕한 죽을 봤는데 그게 포리지였다. 쌀이 아니라 귀리가 들어간. 과일을 넣어먹기도 하고 시럽을 뿌려먹기도 한다는데 콧물같이 쭉쭉 늘어나는게 별로 먹고싶지 않게 생겼다. 한동안 거리를 두다 또 궁금한건 못참아서 동료한데 저거 어떻게 만드는거냐고 물어봤다. 동료가 알려준대로 마트에 가 보니 한번 먹을 수 있는 양으로 컵라면처럼 컵에 담긴 것도 있고 종이에 담겨 파는것도 있었다. 용기에 가루를 붓고 물이나 우유를 정해진 만큼 넣고 전자렌지에 돌려먹으면 된단다. 처음 시도해 본 포리지는 아무맛도 안나는 오리지널 맛이어서 그 후로 더 오래 거리를 두게 되었다. 쌀죽 만들기는 귀찮고 속에좋은 음식을 먹고싶던 어느 날 마트에서 다시 포리지를 보게 되었고 그 당시 '꿀'맛에 빠져있던 때라 시럽이 첨가된 포리지를 샀다. 날이 찰 때 (꿀이 첨가된) 포리지 한 그릇을 따듯하게 데워먹으니 속이 든든한 것이 이래서 먹는구나 하고 깨달음을 얻었다. 요즘은 아침마다 먹는다 포리지. ㅋㅋㅋ

사람이 그동안 살아온 삶과 사고방식이 주류가 아닌 곳에 6년을 살았을 때의 변화는 생각보다 엄청나다. 위에 적은 것들 이외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음이 살면서 이따금씩 느껴진다. 좋게 말하면 상황을 수용하는 범위가 넓어지고 기다림에 익숙해졌다 할 수 있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꼴저꼴 다 봐서 그런지 통상적인 기대치가 낮아진 것 같다. 12년 뒤엔 블루치즈를 한손에 잡고 우걱우걱 먹고있는거 아닌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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