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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살이/워킹홀리데이 2017 - 2018

[영국워킹홀리데이] 적응하자 로컬처럼

하루 꼬박 걸린 비행과 시차의 영향으로 영국도착 첫 날 오후 세시에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리고 열두시간 후인 새벽 세 시에 눈이 떠졌다. 우버와 씨름하느라 공항에서 보낸 혼돈의 두 시간이 결정적으로 감기를 안겨줬다. 자고 일어나니 코가 따끔거리고 목이 너무 간지러워 혹시나 싶어 침대맡을 확인해 보니 천년묵은 먼지가 쌓여있었다. 보이는 곳만 청소하나보다. 몸을 일으켜 못다한 짐을 정리했다. 걸을 때 마다 나무바닥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배가 너무 고파서 어서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해가 뜨고나서 아랫층 으로 내려가 아직 낯선 집안 곳곳을 익혔다. 풀로 켰을 때 1단계 같은 가스레인지, 이가 나간 컵과 그릇들. 공용공간에 있는 물건들은 꺼져가는 생명을 부여잡고 자기몫을 다 하고 있었다. 거실에는 종류별 차를 즐길 수 있게 되어 있었는데 역시 차의 나라 영국이구나 싶었다. 

 

급한 물건들을 사기 위해 시내로 나갔다. 영국은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한다길래 두 손으로 휴대폰을 꼭 부여잡고 지도를 보고 다시 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었다가 를 반복하면서 윔블던역 까지 걸어갔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에 신호등 기둥에 보행자용 버튼이 달려있는데 건너고 싶을 때 그걸 눌러야 하는줄 모르고 파란불이 켜질 때 까지 하염없이 기다렸다. 지나가던 사람이 나를 흘끗 보고는 그 버튼을 눌렀다. 세상 부끄러웠다. 그렇게 쇼핑몰에 도착해 생존영어를 구사하며 운동화, 양말, 플러그 등을 사고 어떤 슈퍼에 들어갔다. 눈돌아가게 많은 처음보는 식료품들 사이에서 그나마 익숙한 것을 사서 나왔다. 나중에 알고보니 윔블던에 있는 꽤나 큰 모리슨스였다. 

 

집에 돌아오자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에어비앤비 손님들 이었다. 스몰톡을 나눴지만 너무 빨라서 알아듣는 척 하면서 대충 웃음으로 떼웠다. 한명은 손 안대고 병을 치료하는 공부를 하는 애였고 다른 한 명은 악기 연주하는 애였는데 둘이 이미 아는사이여서 곧잘 놀러다니는 것 같았다. 밥을 먹어야 하는데 공용으로 사용하는 프라이팬과 냄비들은 너무나 낡았고 가스레인지 불도 약해서 과연 여기 요리를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마트에서 가져온 전자렌지용 음식을 데워 먹었다. 오븐 사용법을 몰라서 고르고 골라 찾은 전자렌지용 음식은 정말 맛없고 비쌌다. 지금이면 오븐 사용법을 물어봤겠지만 그 땐 물어봐도 못 알아들을 영어대화를 시작하고싶지 않았다. 프로 불편러였다 ㅋㅋㅋ 나는 관광객이 아니라 영국에 정착하러 온 것이기 때문에 로컬처럼 적응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피카딜리 서커스에도 테이트 모던에도 가지 않고 동네부터 공략했다. 때가 되면 적응하게 되어있거늘 뭐가 그렇게 진지했을까. 

 

첫 Hmart 방문
맛 없을 수가 없는 조합인데 정말 맛없었던걸 보면 긴장을 많이 했었나보다.

 

영국슈퍼에서 찾는 전자렌지용 음식을 먹다보니 있던 입맛도 사라져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음식에 대해선 매 순간 진심이기에 결국엔 한국슈퍼를 찾아 나섰다. 근처에 H마트가 있었다. 한시간 거리여서 천천히 걸어서 다녀오려 했으나 도로는 생각보다 험했다. 생 차도 옆을 걸어가야 했다. 그렇게 고생해서 라면, 쌍화탕, 삼겹살 등을 사왔는데 그마저도 맛없었다. 긴장한 탓에 뭘 먹어도 맛 없었고 금방 배가 불렀다. 로컬처럼 적응하겠다는 내 의자와는 다르게 온몸으로 외국물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렇게 폭풍같은 긴장감을 아무렇지 않은 척 덮고 지낸지 열흘 째 되던 날 또다른 에어비엔비 손님이 왔다. 나보다 어려보이는 동양인 여자아이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