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스타트업에서 일해보니

현 회사에 취직하면서 처음으로 스타트업에서 근무해 보게 됐다. 이전 회사들은 런던 오피스에만 백 여명 씩 근무하는 나름 규모가 큰 회사들 이었는데 사람도 워낙 많다보니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게 돼 항상 정신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녔던 것 같다. 그러다 정 반대인 작고 아담한 내 현회사와 함께 스타트업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스타트업도 이름만 스타트업이지 이미 덩치가 커질대로 커진 대규모 회사들인 경우가 많은데 우리회사는 아주 작고 영세한, 말 그대로 이제 막 시작한 스타트업이었다. 물론 내가 입사할 즈음에는 이미 상용화 되고있는 서비스가 있었지만 그 점을 제외한다면 회사 규칙이나 복지혜택 같은 것들이 아예 만들어지지 않은 날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워낙 작아서 들어가자마자 망하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으나 사수가 워낙 똑똑해보여서 이양반 믿고 한 번 일해나 보자 하고 시작한 것이 눈 깜짝할 새에 2년이 지나가버렸다. 블로그에 재택근무 찬양과 더불어 회사자랑을 꽤 해놨지만 여기도 회사고 나도 인간 인지라 퇴사하고 싶은 날들이 심심찮게 찾아온다. 유독 이직이 땡기는 날 링크드인을 배회하다 보면 종종 어마어마한 복지를 자랑하며 구인하는 회사들이 보이는데, 그럴 때 마다 내 작고 앙증맞은 회사와 대감집 노비들이 받는 혜택이 비교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직을 하자니 이 회사에서 얻는 분명한 이점을 새 회사에서도 누릴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불분명해 갈팡질팡 하게 된다. 추후에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참고하기 위해 스타트업에서 일하면서 느낀점들을 정리해보려 한다.
1. 복지
서운하리만치 뭐가 없다. 연금보험 하나 들어주고 땡이다. 좋은점이 있다면 회사가 일부를 내주고 근로자가 나머지를 부담하게 할 수도 있는데 우리회사는 100% 회사돈으로 내준다. 잔잔바리로 베푸는 복지가 없다보니 여기에 몰빵한 느낌이다. 그래도 퇴사가 고픈 날엔 프라이빗 헬스케어, 짐 등 회사에 다니면서 받는 쏠쏠한 디스카운트가 그립다. 회사 규모와 함께 복지가 키워지지 않는다면 이것도 나름 퇴사사유가 될 것이다.
2. 업무
많이 배울 수 밖에 없는 구조다. 너무 작아서 뭘 하는지 다 보이기 때문이다. 매일아침 스탠드업에서 한명씩 돌아가면서 전직원이 이야기해도 15분이면 끝날 정도로 작다. 필요시 미팅 막바지에 동료를 잡아둘 수 있다는게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큰 회사에서는 맡은 부분이 상대적으로 작아서 묻어가기 편함과 동시에 모두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삼각지대인 comfort zone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수동적인 성향이 되기 딱 좋은 환경이 되는데 이게 하루하루를 편하게 보내기엔 안성맞춤이지만 멀리보면 자기발전이 없어지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현회사에서는 이와 정 반대되는 환경에서 일하면서 정말 많이 배웠다. 그만큼 나의 무지함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때가 많아서 이년차인 지금까지도 때때로 괴롭다.
3. 피드백 (말 걸면 바로 닿을곳에 있는 그대)
이건 업무와 관련이 있기도 한데 피드백을 받는 속도가 매우 빨라 윗사람들과 바로 소통이 가능하다. 큰 회사에서 일할 때에는 휴가를 가거나 업무관련 승인을 받을 때 상사의 상사의 상사의 상사까지 거쳐가는 보고체계가 꽤 복잡해 답을 기다리면서 하게되는 시간낭비가 꽤 컸는데 현 회사에서는 한명만 거치면 되기때문에 흘려보내는 시간이 일절 없고 피드백 또한 빠르게 받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마이크로매니징이 없고 초반에 헤맬 때 빼고 일 언제되냐고 독촉받은적도 없다.
4. 소셜라이징
이건 모 아니면 도인 것 같다. 회사가 너무 작아서 소셜라이징이 다수의 사람들이 갖고있는 성향으로 굳혀지는 것 같다. 우리회사는 내향형 인간 집합소여서 소셜라이징이 최소화 되어있다. 다 함께 모여서 얼굴보는게 일년에 최소 1회 최대 2회로 (암묵적으로) 정해져있다. 너무 가끔봐서 만날때마다 처음보는 사람들처럼 어색하다. 극내향들과 소셜라이징을 해야하다 보니 회사가 사주는 공짜밥이라도 별로 안먹고싶어진다. 그 덕에 회사가 돈이 굳는 것 같다.
5. 안전성
이건 어딜가나 비슷한 것 같다. 큰 회사는 돈이 안되면 정리해고를 감행하고 작은회사는 펀드레이징 망하면 폭파될 수 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어째저째 잘 버티고 있다. 작은회사일 수록 개인이 맡고있는 업무가 크고 사람뽑기가 어려워 함부로 자르지 못하는 느낌은 있다.
6. 연봉
작은회사라 짜게 줄 것 같지만 의외로 시장대비 섭섭치 않게 챙겨 준다. 허나 너무 작아서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에 훤히 보이기 때문에 연봉 올려달라고 떵떵거리기가 다소 민망하다.
작고 앙증맞은 스타트업에서 일하면서 느끼는 여러가지 장단점이 있지만 현재까지는 단점 때문에 퇴사하고 싶을 정도는 아니어서 그럭저럭 다니고 있다. 개인의 발전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은 조금 실망스럽지만 자율성을 200% 보장하고 이따금씩 머리털이 다 빠질 것 같은 코딩 챌린지를 마주하다보면 아직은 더 붙어 있어야겠다 싶기도 하다. 2년을 다닌 시점에 개발자로서 이 회사에서 일하므로써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수 있는지를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