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살이/게으른 직장인 2025

스타트업 재밌네 ^ㅜ

Busybee_ldn 2025. 5. 14. 17:00

회사에서의 근무기간이 3년을 넘겼다. 고작 3년뿐인 근무기간을 매년 세고있는것도 웃기지만 한 회사를 이만큼 길게 다녀본 적이 없어서 그러니 촌스러워도 이해주길 바란다. 근무 2개월차에 등장한 낙하산, 석달간 파트타임으로의 전락 등 이 작고 앙증맞은 스타트업은 해마다 재밌는(negative) 일들을 던졌고 올해도 실망시키지 않는다. 상반기의 소소한 재미를 말해보자면, 노트북이 오래돼 더이상 특정 환경의 개발을 할 수 없게 된 것, 그리고 요근래 종종 급여입금이 하루씩 늦는다는 것이다. 작년의 재정난에 이어 또다시 하향길을 걷는건가 조마조마 했지만 들어올 돈이 아직 안들어왔을 뿐 망한건 아니라고 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작년과 올 해 통장에 씨가 말라가는 시점에 미국에서 뜻밖의 중간사이즈 잭팟들이 터졌다. 냄새를 맡은 투자자들이 투자금을 더 넣고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래서 이 회사는 녹슨 바퀴로 삐그덕삐그덕 굴러가고 있다. 완충제가 다 깎여져나간 바퀴에 팀원 모두가 달라붙어 매일매일 녹을 제거하고 하루라도 더 써보려 애를 쓰는 모습이다. 

 

나는 왜 이렇게나 불안정한 회사에 여지껏 다니고 있나? 탄탄한 회사에 다녀봤으나 모가지 날아가는건 한순간이며, 돈많고 안정적인 회사는 소유자 시점에서나 하는 말일 뿐 회사의 크기가 고용의 안정성에 비례하지 않더라는걸 두 번의 레이오프로 깨달았다. 그런데 이 회사는 돈이 없을 때 파트타임으로 전환할지언정 나를 자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여기에 크나큰 감명을 받았나보다. 2년간의 연봉 동결에도 불구하고 이직을 참게 만드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이 회사는 연금 빼고는 복지가 전무할 정도로 영세한데, 휴가, 병가를 쓰는게 굉장히 자유롭다. 매니저에게 따로 보고하거나 허락받지 않고 슬랙으로 알리면 되는데 나는 이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아무리 영국이 한국보다 연차쓰기 편하다고 해도 연차사유와 기간 그리고 얼마전에 알려야 하는지 등을 따르는 것은 매니저와 친구사이처럼 부담없는 관계라고 해도 나와 상대방이 하이어라키의 어디 즈음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상기하게 된다. 쉬기위해 받아야하는 허락이 나는 아직도 너무 불편하다. 한국에서 회사를 다니던 때 나름의 이유를 들고 구걸하듯 받아내야했던 연차의 트라우마가 아직도 가시지 않았나보다. 근무시간이 유연하고 연차를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은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말인데 나에게 일을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해마다 이뤄지는 연봉인상보다 자유롭게 주어지는 시간인 것 같다.

 

또하나 신기한 점은 디자이너 없이 굴러간지 n년 째라는거다. 원래 디자이너가 있었지만 작년에 파트타임으로 돌리면서 프리랜서 디자이너부터 정리한걸로 보인다. 이미 만들어져있는 서비스라 새로운 페이지는 비슷한 스타일로 돌려막기 해왔지만 프론트 개발자 여러명이 생각하는 '비슷한 스타일'에 대한 이미지가 각각 달랐으므로, 결국 다채로운 스타일이 파생되고 말았다. 언젠간 누군가 총대매고 다 뜯어고쳐야 하겠지. 

 

테스트 장비도 개인기기로 한다. 안드로이드가 있는 동료가 안드로이드를 나는 ios를 테스트 하는데 가끔 안드로이드 폰을 중고로 하나 살까 생각도 해본다. 여기에 대한 불만은 없다. 모바일 개발을 할 때엔 한국에서 퍼블리셔로 일하던 회사의 여개발자가 손가락을 바삐 움직이며 모바일 테스트를 하던 모습이 떠올라, 지금 내가 그 모습인 것 같아 뿌듯하다. 회사가 싫었으면 안드로이드 기기도 못사는 가난한 회사라 욕할 수 있지만 앞에서 말한 자유로이 쓸 수 있는 시간에 꽂혀 별 생각이 없다.  

 

스타트업에서 일하면서 처음엔 당황스러웠던 일들도 서당개로서 삼년을 지내고 보니 점점 그것들이 주는 쫄깃함을 즐기게 된다. 주변에서 이런 불안정한 회사에 다니는게 불안하거나 스트레스받지 않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그럴 때엔 이미 그 강을 건너봐서인지 마음속엔 충격을 품을 수 있는 약간의 넉넉함이 생긴 것 같다고 대답한다. 돈이 없어져도 사람을 자르지 않고 파트타임으로 돌리는걸 보고나니 미약하게나마 회사에 대한 신뢰가 생겼다. 언젠가 비지니스가 성공을 거두어 큰회사에 먹히면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이 자유가 사라질지 모르겠으나 직원들도 나름 대주주이므로 어느정도 시간은 끌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개발자가 주축이되는 회사에서 개발자 입맛대로 굴러가다보니 일하는 스타일이 꽤 털털하고 이또한 만족스럽다. 번지르르한 혜택은 별로 없지만 돈 적당히 벌면서 몸편하고 맘편한게 나에겐 가장 큰 혜택이 아닐까? 오늘내일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작고 귀여운 이 회사에서 고용의 안정감을 찾게되는 아이러니다.